ⓒ백철극 작가
ⓒ백철극 작가

백철극(白鐵克) 작가는 한국 근대 서양화 1세대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남관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존재나 작품세계가 그다지 조명받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김환기·이중섭의 절친이자 동시대 앞서간 비운의 화가 백철극(1912-2007)’이라고 부른다.

백철극 작가는 1912년 5월 16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바느질로 어려운 생활을 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고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평양 대동강 극장에 간판 조수로 일했다.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영화간판, 신문 배달 등으로 몇 년간 학비를 모아 동경의 니혼대(동경대) 미술과에 1934년에 입학했다. 그때 같이 입학한 친구가 김환기였다. 당시 백철극 작가는 김환기 작가와 같이 일본 현대미술의 대가이자 유럽의 유명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藤田嗣治, 1886년 ~ 1968년)’ 그리고 처음으로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이며 ‘이과전’(二科展)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자 여자들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 강사였던 ‘도고 세이지(東郷青児, 1897-1978)’에게 사사를 받았다.

이후 도쿄 홍고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 생활을 마치고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hanghai Street 40x31 Oil on Canvas 1940, Shanghai ⓒ백철극 작가
hanghai Street 40x31 Oil on Canvas 1940, Shanghai ⓒ백철극 작가

당시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상하이에서 그는 28살이란 젊은 나이에 <홍커우 북 사천로> 거리 풍경을 대담하고 거칠게 표현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당 그림을 1940년 때 상하이 당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중국 일본 미술가협회전 공모에 응시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대상을 수상했다. 이 그림의 화풍으로 보아 백철극 작가는 당시 인상파의 화풍을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그가 얼마나 현대적인 시선으로 작업을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10여 년간 그린 작품으로 수상작 외에 스케치와 유성 파스텔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져 온다. 20대 후반임에도 드로잉 작품에서 보이는 묘사력과 표현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철극 작가의 인생에서 상하이는 잊을 수 없는 장소일 것이다. 가난했지만 고향 사람인 부인을 만나 신혼을 보낸 곳이며, 백범 김구 선생의 자녀들이 다니던 인성학교에서 그는 아내와 같이 각각 중학교 미술 교사와 초등학교 교사로 몇 년간 일하기도 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이는 그에게 더욱 각별한 곳이다.

NPJP-ㅡMaisons, (40x36cm) ⓒ백철극 작가
NPJP-ㅡMaisons, (40x36cm) ⓒ백철극 작가

1949년 해방 후 고국으로 귀환한 백철극은 곧 한국동란으로 어렵고 고난의 세월 속에서 살아간다. 생계를 위해서 미군 장교들의 주문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다.

1960년대 생계형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차가운 추상의 대표적인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미국 액션 페인팅의 대표작가인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같은 추상화가들에게 심취해 있었으며, 그 영향으로 추상적 작품세계에 깊이 빠졌다. 이후에 그의 작품 속에 아주 빈번하게 특징적인 면을 분할하는 구성주의적인 화풍이 바로 그러한 영향으로 보여진다.

또한 종종 <침략자>나 <비>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물감의 흘림이나 검은 선들은 잭슨 폴락의 드리핑 회화나 패턴에 영향을 받았음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가적 신념과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철극은 더 높은 예술가의 길을 위해 1967년에 자녀 3남 2녀를 거느리고 캐나다로 이민길에 오른다. 그곳에서는 몬트리올과 뉴욕 그리고 LA 등지에서 열정적으로 작가 생활과 발표를 이어갔다.

1970년 뉴욕 자신의 개인전에 일본유학 시절 때 절친이었던 김환기 작가와 재회했다. 그는 작고하는 1974년까지도 김환기 작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과 작품세계를 공유했다.

Composition of Rain, (116x92cm) ⓒ백철극 작가
Composition of Rain, (116x92cm) ⓒ백철극 작가

이후 백철극 작가는 뉴욕과 파리에서 그의 본격적이고 창조적인 전성기가 펼쳐진다.

미국에서도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역사 깊은 Foster & Kleiser라는 옥외 상업미술 회사에서 일했으며, 그럼에도 꾸준히 자신의 추상 세계에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다 마침내 70~80년대에 걸쳐 그토록 그리던 파리에서의 작가 생활이 꽃피기 시작한다.

파리에서 1980년 뱅센느시 살롱 공식 전시에서 <가을>과 <예수상> 작품으로 시장상을 수상하고, 다음 해 가을 1981년에는 살롱 도톤느 전에서 ‘센강 풍경’으로 단독실 전시 영광을 누리며 ‘도톤느’ 상을 연거푸 수상해 그의 역량을 보여줬다.

1970년대 주목할 작품으로는 <오리엔탈 리듬>이 있으며,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바탕에 옅게 농담을 펼치면서 커다란 달의 형상을 좌측에 배치했고, 우측으로는 대나무 형상을, 또한 대나무 잎을 사군자로 치듯이 먹으로 완결하면서 추상적 형태로 공간에 대한 여백과 필체를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Rain, 170x132, Oil on canvas, 1972 N.Y. ⓒ백철극 작가
 Rain, 170x132, Oil on canvas, 1972 N.Y. ⓒ백철극 작가

그러한 공간과 형태의 구성은 1972년에 제작한 <RAIN>이란 작품에서도 블랙과 레드의 바탕 위에 선을 가지고 비구상적인 모습을 형상화했다.

아마도 그의 작업 중에 가장 대표작은 1978년에 제작된 <비행기>다.

<비행기는>는 파리에서 유학할 때의 작품이다. 백간노미의 작품 중에도 가장 구성미가 돋보이고 조형성 있는 작품으로써 비행기 형상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는 시각적 요소의 구성에서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대상에 의존하기보다는 그 대상을 감성의 근원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선이나 형태, 컴포지션 등을 화면에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바꿔 놓는 독창성을 구축했다.

특히 선과 형태의 방향성과 조형성에 주목하면서 리듬과 패턴에 대한 표현양식을 바탕으로 회화의 모티브를 살려냈다.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선과 형태가 반복적인 듯 일정한 간격을 지키면서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서 균형과 조형미를 풍부하게 드러낸 것이다.

작품세계의 일관성으로 볼 때도 명확한 메시지나 주제를 제시하기보다는 작품을 제작할 때 작가의 내적 감정을 중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행기 ⓒ백철극 작가
비행기, 104x81cm,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소장 ⓒ백철극 작가

그러한 점에서 백철극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적절한 색채를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것이다”라는 매우 폴 클레(Paul Klee)적인 신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초기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백철극 작가는 LA에서 2004년 그의 마지막 전시 당시 LACMA 디렉터 Mr. Fox를 초빙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작품 중 ‘Battle’을 선정해 수집한 것으로도 전해지며 3년 후인 2007년 지병으로 95세의 삶을 마감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이런 그의 예술가적 생애와 작품들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차남 백필립 의료선교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그 잊혀진 작가를 다시 발굴할 수 있었다.

2009년 백필립 의료선교사를 통해 그의 대표작인 <침략자>와 <비행기>는 국립현대 미술관에 소장됐다. 우리는 그의 숨겨진 유명작품들을 공개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다.

어둡고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격렬한 자신의 고뇌를 충실하게 화폭에 반영한 화가 ‘백간노미’(백철극 작가의 다른 이름), 수화(繡畫) 김환기의 친구 백철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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