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엽 작가

“예술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 시대에 있어 예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까지 많은 미학자와 예술이론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해 왔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미와 의도를 포괄하고 있는 예술을 정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해도 예술이란 모방, 혹은 직관이며, 상상의 유희, 미의 창조, 감정의 표현, 소망의 승화된 형식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일면과 속성이 제기되는 한편, 20세기 영국의 미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예술을 ‘인간 최초의 기본적인 정신 활동’이며 ‘인간 삶의 가치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적어도 현대사회에 있어 예술은 단순한 쾌락적 경험이나 감각의 만족으로 치부될 만큼 그 가치가 무력하지 않다.

일찍이 도덕을 희생시키는 예술을 걱정하면서 예술이 인간의 이성적 의식을 감정에 옮기는 인간 생활이라고 주장한 톨스토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에 경험했던 느낌을 스스로 상기하도록 하고 그리고 나서 움직임, 선, 색채, 소리 또는 단어 속에서 표현된 형식 등의 수단에 의해 그러한 느낌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그러한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을 예술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인간162.2x130.3cm, oil on canvas, 1982
ⓒ인간162.2x130.3cm, oil on canvas, 1982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의 성격을 볼 때 황용엽 작가의 회화는 그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과 기능을 충분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황용엽 작가의 예술세계의 근저를 살펴보면 예술이란 곧 자기 자신의 체험적인 정신 활동의 소산이라는 의식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가장 관심을 두고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은 ‘인간의 삶’이다. 이러한 사실만 해도 그의 예술 의식이 어느 지평에 닿아 있는가가 쉽게 구별된다.

많은 작가가 현대미술의 사조에 흔들리고 있을 때 그는 인간의 표현에 골몰해 왔다. 그의 이러한 작업 태도와 예술가적 기질은 오로지 작업하는 일 외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지 그 숱한 미술상과도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 황용엽 작가는 조선일보사가 제정한 이중섭 미술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의 수상은 오직 행운 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닌 만큼 영광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위한, 인간을 향한 예술세계를 갈망했다. 그렇다면 그가 줄기차게 인간에 대한 집요함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어디서 기인되는 것일까.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을 밝힌 바 있다.

ⓒ가족 162x130.3cm, oil on canvas, 1965

“1950년 6월 25일, 나는 남과 북이 서로 같은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싸움에 휘말리는 처절한 죽음의 상황을 몸소 겪어야만 했다.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을 보아야 했고 부모, 형제, 처자를 잃고 절망하는 겨레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이 모든 일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는 아픈 상흔으로 남아 있다. 아니 그때 입은 육체적 부상의 흔적은 내 몸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슬픔의 앙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날의 삶을 표출하기 위해 암담한 한계상황 속에 묶인 우울한 인간상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림이란 곧 화가의 삶의 증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지난날의 삶에 비춰 도저히 밝고 기름진 인간의 모습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화폭에서 사방으로 묶이고 이지러진 인간상을 끈질기게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기도 하다. 예술에 대한 작가의 증언은 그의 작품의 근원과 뿌리가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상처를 포옹하는 영역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의 회화적 인간상은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비극적인 상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림들은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상처의 소산이다. 그의 그림 속에 인간은 우리들의 원초적인 삶의 편린이며, 인간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며 한국 현대사의 상처다.

양식적으로 보면 70년대 중반 그가 묘사하고 있는 인간은 사실 인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죄를 대속한 고행의 그리스도상처럼 보이기도 하다. 깡마르고 흰 성의(聖衣)를 걸친 채 알몸으로 황량한 길을 거니는 모습이 그 자신의 자화상을 떠오르게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남에게 자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를 호소하는 단독자의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의이야기 145.5x112.1cm, oil on canvas, 2017

그의 단독상은 80년대로 들어오면서 점진적인 구성과 형태 그리고 색채의 변화를 보인다. 그의 변화 중 특징적인 경향은 인간을 모티브로 두‧세 사람의 군상으로 처리한다는 점과 70년대 후반의 인간 표현처럼 처연한 모습만은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좀 더 삶을 관조하는 원숙한 자세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또 그의 화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화면 분할이다. 초기 그의 선들은 병렬적이며 거미줄처럼 다양한 선을 보였다면, 80년대 전후의 선들은 형태 감각의 측면으로 옮겨갔다. 80년대 이전에는 인간의 삶에 얽히고 설킨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선을 보였다. 이는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당시 현실적 삶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친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인체 표현에 있어서는 베르나르 뷔페의 선을 상기(박용숙)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그의 선은 매우 절제되고 통제된 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인간의 상황을 보이기 보다는 조형의 절대적 요소로서 가치를 지닌 선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반영했다고 풀이된다. 그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선과 화면의 구성은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강서고분벽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 그의 그림에서 질감과 전체적인 인상 등이 벽화 양식의 스타일을 담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벽화가 갖는 투박하면서도 질박한 질감, 무수히 균열이 일은 선, 그 그림의 주술적이며 기원이 담긴 내용 등 이런 것들이 황용엽의 회화에 용해돼 나타나고 있다.

ⓒ어느날, 116.8×80.3cm(50호), 캔버스에 유채, 1989

물론 그보다는 훨씬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회화는 이렇게 그만의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기본적인 세계는 벽화의 이미지를 담고는 있지만, 탐닉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인물은 충실한 풍경 속에 머물며 외형의 선들은 날카롭고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는 화면으로 완결된다. 화면의 단조로운 요소에서 그는 새로운 세계로의 탈바꿈을 시도했다. 그것은 후기작들에서 거의 빠짐없이 나타나는데 이지적이고 절대적인 화면 속에 우리의 전형적이고 전통적이라고 평가된 민화의 양식과 소재들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근래 자주 등장하고 있는 나무의 형태, 탱화나 민화 속에서만 발견되는 불로(不老)의 영지버섯, 꽃 그리고 민화의 중심 색채라 불리는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란색의 인용 등에서 비롯됐다. 그가 한국적인 미감(美感)을 인위적으로 도입시키려는 것보다는 연륜과 작가의 치열한 사유에서 얻어지는 회귀 의식 때문으로 해석된다.

예술의 참다운 세계는 인간의 보편적 공감대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공감은 보편적 요소를 작품 자체가 포함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가 참담한 현실의 상처 위에서 출발해 개인의 상흔, 그리고 인간의 감성에 공감하는 한국적 미의식에 눈뜨기까지 그의 내면의 정신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주술과 기원에 바탕을 둔 샤머니즘의 세계다. 그리고 민화는 사실 이러한 기원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서민 양식의 집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그의 작품에는 양식적으로 더욱 균형 있고 짜임새 있는 안정된 변화를 보여준다. 특별히 색채에 있어서 우울하고 비애적인 어두운 색상에서 한층 더 경쾌하고 밝은색으로 바뀌는가 하면, 혼란과 불안의 선들에서 치밀하고 조형적으로 세련된 선들로, 단순한 인간만의 구성에서 나무가 있는 풍경으로 안정된 화면의 조형성을 얻고 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여전히 그는 회화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인간 모습의 형상화에 대한 집요함을 보여준다. 현재의 작품들은 지금보다 훨씬 세련되고 새로운 인간상들로 펼쳐진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 이미 예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장식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색채와 조형미를 얻는 작업, 토속적인 민화와 전통적인 문양에서 마지막으로 한국적 미의 원형과 특질을 탐색하는 것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인간에 대한 의식의 이완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닫혀진 해석에서 새로운 인간상을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예술가적 열망인 것이다. 우리는 그의 회화를 보면서 인간의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우리들의 초상을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갖게 된다. 이는 그가 출발했던 인간의 극한 상황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참모습을 절대 간과하지 않으려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증언의 기록과 열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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