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 작가

‘된장 뚝배기 같은 놈’,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한마디로 부른다.

김선두. 그는 남도의 예술이 깃든 시서화가 뛰어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붓글씨는 물론 화론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교사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갈등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의 성화를 뒤로 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고, 그 고생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속담처럼, 김선두 그는 화가가 됐다.

1958년 12월 3일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자란 그는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 예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한국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그를 아주 평범한 미대 교수처럼 느낄 수 있겠지만, 한국 화단에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 장지에 먹, 분채. 138×178㎝, 2019 ⓒ김선두 작가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 장지에 먹, 분채. 138×178㎝, 2019 ⓒ김선두 작가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수묵이 주류를 이루는 풍토였다. 그는 1984년 제7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며, 문턱 높은 화단에 화려한 주목을 받으며 데뷔했다. 또 이듬해 열린 제4회 미술대전에서 한국화 부문 특선의 영예를 안으면서 그는 또다시 촉망받는 떠오르는 신예 작가로 부상했다. 그가 대상을 받은 작품은 <일그러진 달>, 미술대전에서 특선한 작품은 서커스 소년이 오색 우산을 들고 외줄을 타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린 <외길>이었다.

당시 수묵이 강세를 보이는 화단에서 채색으로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간 그의 작업은 일찍부터 돋보이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수묵과 채색이라는 분류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재료의 선택으로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회화의 구도와 형상, 색감 등에서 시각적으로 과감한 실험을 시도하며 독특한 화풍을 개척해 나가는 가능성으로 작가의 투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대단히 부지런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해에만 몇 번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화실에는 전시를 기다리는 수십여점의 작품들이 대기 중이다.

낮별-까치, &nbsp;장지에분채 &nbsp;142x86cm, 2020 ⓒ김선두 작가<br>
낮별-까치,  장지에분채  142x86cm, 2020 ⓒ김선두 작가

소위 말하면 그의 붓에는 물이 잔뜩 올라 있는 모습을 본다. 실제 그는 아주 약간은 어수룩하고 모자란 듯하지만, 예술가로서 아주 훌륭하고 타고난 환쟁이 기질과 천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를 만나 보면 언제나 여유 있는 모습과 서투른 말솜씨로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토종 된장 뚝배기 같은 화가라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그는 오래전 학고재에서 아주 이색적인 전시를 하기도 했다.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라는 책을 내면서 전라도 장흥이 고향인 소설가 이청준, 시인 김영남, 화가 김선두 이 셋이 모였다.

그들은 함께 모여 여행하면서 그 끈적거리는 동행의 인간미를 바탕으로 각각 산문, 시, 그림 등으로 한을 풀어냈다. 소설가 이청준은 <고향의 속살 읽기>라고 했고, 김영남 시인은 속내를 까보이는 듯이 <고향의 젖가슴 만지기와 아랫도리 만지기>로 진진하게 표현했다. 이들 세 사람은 예술가적 열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던한 사이였다. 지난 3년이란 기간을 거듭 고향길을 밟으며 더듬는 동안 한 번도 손이 부딪치거나 엉긴 적이 없었다고 하니, 화가 김선두의 넉넉한 속내를 가늠케 한다.

그런 넉넉함처럼 고향이 바다와 들판과 소읍이 그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평촌리의 촌놈 내음이 그림에 물씬 물씬 풍겨 오기도 한다.

<별을 보여드립니다-공도> 장지에 먹 분채 67×93cm 2015 ⓒ김선두 작가

그런 그가 최근 ‘南道연작’의 행 시리즈에서 출발해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그림에 온몸을 바친 바 있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그림에는 품격과 격조가 기운과 운필에서 흘러넘친다.

거침없이 휘감기는 모자란 듯한 필치, 조급해하지 않고 비워두는 깊은 사색의 여백과 문기 등이 화면을 감싸고 있다. 특히 휘감기듯 삐치는 길의 이미지와 붓놀림의 유려함이 빚어내는 이미지들이 화폭에서 춤추고 있다. 자연스러운 시골 고향의 농촌 풍경이 부드럽게 감추어지듯 비껴져 내려오는 선. 이는 김선두 운필의 참다운 매력이다.

그 바탕은 무엇이며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하는 걸까.

그는 산수화란 단순히 산과 물이 있는 경치를 그린 풍경화와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그는 산수화가 오묘하고 무궁무진한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담은 매우 이념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연과 산을 오르는 진정한 이유며, 그 산을 다시 화폭 위에 옮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산수화를 즐긴다는 것은 단순히 풍경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에 대해 사색하고 관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예술에 대한 깊이와 고민을 느껴지게 하는 대목이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예술과 철학의 깊이는 그가 만난 두 분의 선생 때문이다. 그 두 분이 바로 서울대 교수였던 일랑 이종상 화백과 중앙대학교의 산동 오태학 교수다.

별을 보여드립니다-질경이_장지에 먹, 분채_94x59cm_2015 ⓒ김선두 작가
별을 보여드립니다-질경이_장지에 먹, 분채_94x59cm_2015 ⓒ김선두 작가

나에겐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두 분과 사제 관계 중 산동 선생의 크신 배포와 당신의 작품에 대한 작가적 자존심, 그리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솔직함이었다고 할만하다.

김선두는 그러한 면에서 두 분의 스승을 잘 만났다. 일랑이 자문한 <취화선>에 최민식 역으로 그림을 그린 역할도, 학생들에게 영정을 제작해 어려운 시기에 큰돈을 만지게 해준 것도 스승 일랑 이종상 화백이다.

일랑 이종상 화백의 지도 방식 또한 특별했다. 80년대 초 진경산수를 위해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에 세종로 앞에서 화구를 펼쳐놓고 그리다가 경비원에게 붙들려가 골방에서 흠씬 맞아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아프다고 한다. 보통 이런 교수들의 가르침들이 그림의 신기를 꺾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바닥에 잠들어 있던 오기와 투지를 불러일으켜 준 쓴 약이 됐다.

사실 김선두 작가는 여럿 중요한 상들을 받아 가면서 성숙해 있었다.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이제 그는 교수가 돼, 그 시절 스승이 그렇게 제자들을 혹독하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br>(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br>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그는 “화단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엄존하는 정글과 같은 곳인데 사자가 자기 새끼들을 키우듯이 강하게 키우지 않으면 화단에 나왔을 때의 시련과 고비를 넘지 못했다. 특히 재능있는 제자일수록 더 엄하고 힘들게 가르치신다”며 “따라서 어쭙잖은 재주나 기교를 부릴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좋은 작가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도를 간다. 인간 그 자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꾸밈없이 자기 자신을 그리면 된다. 진실 되면 언젠가는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참다운 스승은 입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슬기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라는 말을 그는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이제 그도 정년을 한해 앞둔 교수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산줄기로 연결된 백두대간. 그는 이 백두대간의 종주를 통해 우리 국토에 대한 아름다움을 직접 내 발로 걸어가면서 느끼고 싶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새해 고민 화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신년의 은총이 있길.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