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사건] 방직공장 여공들의 투쟁기
열악한 작업 환경,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곳’
한국 최초 여성지부장 선출 후 변화 꿈꿔
알몸시위·똥물세례 등에도 이 악물고 버텨
여성노동자들 힘 가지려면 많이 배워야 해
여성이 노동운동 다시금 활개하길 기대해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 10위’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는 여성노동자들의 공이 상당히 컸다. 1960~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우리나라는 기존의 농업국가 이미지를 벗고 경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뤘고, 그 중심에는 ‘여성노동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는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부속품과도 같았다.

노동시장 가장 밑바닥에 있던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놓인 부당한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맞서 싸웠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폭언과 폭행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싸움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점점 여성의 노동가치가 상승하고 노동사회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대두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차별의 존재로서 저임금, 비정규직, 부당해고 등 각종 차별과 불이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깨부수기 위한 투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100년이 훌쩍 넘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주춧돌이 된,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투쟁으로 쓴 여성노동史’를 기록해봤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직공장 ⓒ서울시/뉴시스
 일제강점기 경성방직공장 ⓒ서울시/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한국은 60·70년대 산업화와 함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1960년대에는 섬유·식품·잡화 등 주로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 발달했으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기계·철강·조선·자동차·기관차·비행기 등 중공업이 크게 성장했다.

경제구조의 변화로 사람들은 농촌에서의 삶을 접고, 공장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여성들은 이른 나이에 노동에 뛰어들었다. 여성들은 대부분 섬유·봉제공장 경공업에 종사했다. 실제 1970년대 초부터 말까지 경공업과 전자제품 제조업체 노동자의 남녀 성비는 4대 6, 5대 5 정도로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다.

한국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한 경공업, 그리고 경공업의 주축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그들의 가치나 평가는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불과했다.

그 시절,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던 섬유제품제조기업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관리직은 모조리 남성들에게 뺏겼다. 

그러나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알몸으로 버티고 똥물을 뒤집어쓰면서 사측의 노동탄압에 맞섰다. 그 결과 한국 최초 여성 노조지부장 탄생과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노동성과를 기록했다.

동일방직 노조의 3대 여성지부장 이총각(74)씨는 공장에서 24시간 돌고 도는 기계에서 뿜어나오는 열기만큼이나 뜨거웠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기를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방직공장 ‘여공의 삶’

70년대 인천에는 광목·포플린·재봉실·혼방직물·면직물을 생산하는 ‘동일방직’이 있었다. 동일방직의 전신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이다. 광복 이후 동일방적 인천공장이 귀속재산 불하(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되가져가지 못한 한국 내 부동산 및 자산을 미군정이 몰수해 개인에게 파는 것)되며, 동일방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동일방직은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공장 중 하나로 명성이 자자했기에,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선망하는 꿈의 직장이었다. 시설과 급여 등 여건과 환경이 다른 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다고 한다. 다만 그만큼 노동 강도는 만만치 않게 강했다.

동일방직은 주로 솜에서 실을 뽑아 면포를 만들거나, 화학섬유제품을 생산했다. 생산직 대부분은 여성이었는데 이들의 업무는 솜뭉치를 실로 만드는 ‘방적’과 실로 옷감을 짜는 ‘직포’로 나뉘었다.

이총각씨는 1966년 18살 무렵에 처음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일주일 간 실을 끊는 법을 배운 신참 이총각씨가 배정된 업무는 방적 중에서도 실을 빼내는 ‘정방’이었다. 정방은 3개의 팀이 3교대 근무로 돌아갔는데, 한팀당 1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큰 부서였다.

당시에도 법정 근로시간은 일일 8시간이었지만 12~13시간 근무는 기본이었다. 잔업 이후 근무교대까지 하려면 밥 한술 제대로 뜰 여유도 없었다. 특히 정방은 실이 기계에서 나오다 끊어지면 빠르게 빼서 연결해줘야만 기계에도, 생산에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게다가 원래 맡아야 할 기계보다 더 많은 기계를 관리하고, 굴러가는 속도도 최대치로 올리다 보니 누가 대신 일을 해주거나 기계를 멈춰버리는 것 아니고서는 굶는 게 당연지사였다. 때문에 노동자 상당수가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화장실 이용이라고 자유로웠겠는가. 2~3분이면 후다닥 다녀올 수 있지만 그 시간조차 자리를 비우지 못해, 참을 수 없이 급할 때는 관리자가 없는 틈을 타 나무로 된 마루바닥에 싸고 스며들길 기다리기도 했다.

작업환경은 어찌나 열악한지, 이총각씨는 출근 첫날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솜먼지가 공중에 펄펄 날려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는데, 눈꼽을 떼면 전부 솜뭉치일 정도였다. 작업복으로 환복 후 입고 온 옷은 보자기에 싸서 기계 한편에 뒀다가 퇴근할 때 갈아입었는데, 손으로 툭툭 털어내기만 해도 쌓여있던 솜먼지가 흩날렸다. 탈의실도 마땅치 않았던 탓에 나중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작업복을 입은 채 출퇴근을 했다.

방적공장은 실을 뽑을 때 적정 온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실내 온도가 25~26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더웠다. 여름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였지만 환기시설조차 없는 공장에서 냉방은 꿈도 못 꿨다. 때문에 사계절 내내 여름 작업복을 입는 것으로 버텨냈지만 무더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 때문에 땀띠를 달고 살아야 했고, 발은 무좀균에 감염됐다.

당연한 삶이라 생각했고, 소중한 직장이라 여겼다.

“대부분 첫 직장이기도 했고, 지방이나 주변 섬에서 온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 동일방직 직원 규모가 1500명 정도로 컸는데,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겠어요. 일본 관리자 사택이 있었는데, 그냥 돈 안 받고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입사하는 사람들도 줄을 섰었어요. 실제 입사한 후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무상으로 일하기도 했고요. 그런 게 당연한 줄 알았던 거죠.”

동일방직노조 3대 여성지부장 이총각씨 ⓒ투데이신문
동일방직노조 3대 여성지부장 이총각씨 ⓒ투데이신문

1972년 한국 최초 여성지부장의 탄생

방직공장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동일방직도 마찬가지였다. 남녀성비가 2대 8 정도로 여성의 수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관리직 대부분은 남성이 차지했다. 동일방직은 위에서부터 대리-담임-반장-조장 체계로 돌아갔는데 조장과 반장까지는 숙련된 생산직 노동자 가운데 선발하기 때문에 여성도 가능했지만, 관리직급인 대리와 담임은 대다수 남성이었다.

임금차이도 당연했다. 이총각씨는 입사 당시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70원이었다면, 남성은 500~700원 선이었다고 기억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신여자대학교 홍석률 교수가 쓴 ‘동일방직 사건과 1970년대 여성노동자, 그리고 지식’ 논문에는 실제 70년대 말 남성노동자의 90% 이상이 월 10만원 이상의 임금을 받았다면, 여성은 평균 5~6만원에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활동에서 마저 차별받아야 했다. 당시에는 모든 노조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였고, 각 산업별로 공장 단위의 지부가 존재하는 식이었다. 동일방직에는 일찍부터 노조가 존재했는데, 이 역시 남성노동자들이 지배해왔다. 게다가 어용노조였던 탓에 여성노동자들의 권익개선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동일방직 노조는 겉으로 보이는 형식으로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대의원선거를 통해 대의원을 선출하고, 뽑힌 이들이 임기 3년의 노조 지부장을 뽑고 간부진을 구성했다. 물론 이 같은 틀을 갖췄더라도 지부장에는 항상 남성노동자가 올랐다.

가부장적인 시대적 배경에 따른 남녀 간 지위 격차가 있었고, 여성들 스스로도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나는 못 배운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는 것이 없으니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거죠. 남성보다는 항상 밑에, 동등하게 산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여성의 삶은 참 기구했죠.”

이런 악습이라면 악습일 사회적 분위기를 최초로 깬 것은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노동문제와 도시빈민 문제, 노동자 이권 보호 등을 위한 활동을 하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존재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공장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대우에 관함 문제를 인지하고 공장 실태조사 및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법과 노조 교육을 진행하기로 했다.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위장취업을 했고, 그렇게 알게 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과 노조 교육을 실시했다.

“목사님이 나와서 보니까 동일방직 근로조건이 악조건이었던 거죠. 그래서 근로기준법. 노동법, 노동조합법에 대해 굉장히 많은 교육을 했어요. ‘이런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는데 여러분은 왜 누리지 못하느냐’, ‘힘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끼리 뭉쳐야 한다’는 말을 했었죠. 그때 가톨릭노동청년회와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노동교육을 해서 최초 여성집행부를 만들어 낸거죠.”

이런 활동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은 그간 자신들이 겪어온 대우를 자각하고 대의원 41석 중 29석을 여성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972년 5월 10일 열린 동일방직 노조 정기대의원회의에서 주길자씨를 여성 지부장에 앉혔다. 동일방직 최초를 넘어, 한국의 최초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 지부장은 노조 집행부를 전원 여성으로 구성했고, 노동자 권익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성집행부가 들어서고 정말 많은 게 변했어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노조의 살림살이, 교섭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됐어요. 사실 노동자들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임금인상 아니겠어요. 상당히 많이 올렸던 걸로 기억해요. 또 교섭을 통해 생리휴가, 주휴수당도 다 받게 됐고, 탈의실과 기숙사도 생겼어요. 남성 중심의 어용노조가 26년 동안 집권하면서 하지 못했던 걸 여성집행부 3년 만에 이뤄 낸거죠.”

1978년 2월 21일 새로운 지부장 선출 대의원회에서 벌어진 똥물 투척 사건 ⓒ이총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알몸 시위부터 똥물세례까지

첫 여성집행부가 탄생한 이후, 기존의 노조 집행부와 사측은 ‘여자들, 1년도 못할 거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임기 내 많은 것을 변화시킨데다가 1975년 2월에는 이영숙씨를 2대 여성지부장으로 앉히기까지 하자, 사측은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대의원회의 선거를 앞두고 사측은 남성노동자들을 동원해 와해작업에 나섰고, 여성 집행부 측과 반대 측의 비율이 대등한 비율로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는 같은 해 7월 23일 반대 측은 일방적으로 대의원회를 개최했다. 기존 여성집행부를 불신임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집행부를 조직하려는 심산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영숙 지부장과 당시 총무부장이었던 이총각씨는 경찰에 연행됐고,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강당에서 항의농성에 나섰다. 당시만하더라도 파업은 사실상 불법으로 여겨졌던 때로, 25일 경찰이 출동해 강제해산에 나섰다. 경찰과 사측의 진압에 여성 노동자들은 반나체로 맞섰다. 당시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여성집행부를 중심으로 조직력이 커지고, 사측이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워지니 여러 가지를 문제 삼기 시작했어요. 화장실에 가 자리에 없거나, 야간 근무에 깜빡 졸 때, 아파서 결석하면 시말서를 쓰게 했어요. 부서이동도 시키고요. 그래서 우리가 준법투쟁을 시작했는데 그날 오후에 저랑 이영숙 지부장을 연행해간 거죠. 그때 조합원들이 회사가 노조를 말살시키려 한다면서 알몸시위를 한 거예요. 7월 말이면 얼마나 더워요. 당시 강당이 100명 정도만 들어가도 꽉 찼는데 200명 이상 부대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덥기도 했고, 옷을 벗으면 잡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옷을 벗자고 하고, 하나둘씩 동참한 거죠. 물이랑 전기도 끊고, 먹을 것도 안 줬어요. 나중에 노조 담당 형사가 그 광경을 지켜보자니 너무 처참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거나 노조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떠난 이영숙 지부장의 빈자리는 이총각씨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1978년 2월 21일 새로운 지부장 선출을 위한 정기대의원선거가 열렸다. 앞서 여성집행부 와해에 실패한 사측은 이번에야말로 자신들의 뜻을 달성하고자 이를 갈았다.

이총각씨 집행부도 험악한 분위기를 인지하고,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다. 투표는 이날 오전 6시부터 치러졌다. 교대시간에 맞춰 투표장에 노동자들이 하나둘 들어서는 순간, 어디선가 반대 측 노동자들이 드럼통에 인분을 한가득 담아 투척하기 시작했다. 통째로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입과 속옷 안으로 집어넣기도 했다. 미리 도움을 요청했던 경찰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돌아오는 건 외면과 욕설뿐이었다. 상급노조인 섬유노조에서 파견된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회사 뜻대로 노조는 남성 집행부가 집권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후 이총각씨 등 간부를 포함한 124명의 노동자는 동일방직에서 해고됐다. 이후 80년대 초까지 복직투쟁을 쉬지 않고 이어갔지만 회사로 돌아가진 못했다.

동일방직노조 3대 여성지부장 이총각씨 ⓒ투데이신문

결과적으로 여성집행부의 노조 정상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도 잃었다. 그럼에도 똥물에 온몸을 내던졌던 그날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총각씨는 지금도 여성노동운동을 이끄는 후배들에게 노동운동의 강철같은 힘은 노동교육에서 나온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다.

“지부장을 지내면서 진짜 대학에 나온 사람 부럽지 않게 민주적인 교육을 노조에서 다 배웠어요.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가를 알게 됐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우리가 힘을 가지려면 알아야 해요. 알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요. 그래야 조직을 할 수 있고, 조직을 해야 힘을 얻게 되죠. 그래야 투쟁도 하고요. 힘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서 이총각씨는 여성노동운동이 다시금 활개를 찾길 기대했다.

“중공업 계통에는 남성 비율이 높고, 그쪽의 조직이 강하다 보니 그렇지 여성노동자들의 동력이 약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에요. 양대 노총에서도 이제는 전국 여성노조위원장이 탄생하는 소식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이네요. (웃음)”

한낱 기계 부속품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주어진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던 여공들이 용기 내 연대하고 목소리를 높인 결과물은 매우 값진 것들이었다. 이 땅의 노동자로서 마땅히 누렸어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내적으로도 노동자로, 인간으로의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동일방직 투쟁은 동일방직 민주주의의, 여성노동운동의 성장 가능성과 희망을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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