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크놀로지 미술의 한계 극복,

고정관념을 깬, NFT아트의 붐

온라인미술시장의 새로운 판로?

2021년 4월 삼성 미술품컬렉션 기증, 소장품관 유치전으로 지역분쟁이 사회적 이슈의 한편으로 주목되는 사이에 미술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바로 ‘NFT아트’의 등장일 것이다. 현재 NFT아트는 아트테크로, 국내 온라인미술시장에서 크게 주목을 받으며, 소셜미디어와 디지털플랫폼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토큰, 암호화페, 블록체인, 이더리움 등 디지털자산의 개념을 넘어서, 예술과 만난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디지털아트의 주목은 백남준(1932~2006)의 텔레-커뮤니케이션을 시작으로 세계화와 함께 테크놀로지 미술의 시대가 컴퓨터 미술가들에 의해서 열렸다. 본격적으로는 1990년경 김윤, 송주한, 신진식과 같은 신세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서구의 포스트모던과 다원주의를 맛 본 세대들이 가정용컴퓨터를 기반으로 원격현전, 가상현실, 3D그래픽 등을 활용한 매체혁명을 보여줬다. 20~30대의 인터넷애호가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통로로 주목되면서, 온라인미술시장이 디지털공간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웹아트와 같은 가상미술관이 개설되거나 《인터넷전》(1996)과 같은 전시로 작품소개/구매/감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소개되었다.1) 평론가 유재길에 따르면 당시는 “과학적 기재들을 이용하여 풍부한 이미지 창조의 실험이 테크놀로지 미술가들에 의하여 활발히 이루어지고, 대중은 예술과 과학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2) 하지만 디지털아트는 주류 동시대미술과 분리되고, 뉴미디어아트로 설정되면서 그 한계성을 드러냈다. 시장성이 부족한 작품의 저자성/결핍, 원본/복제본에 따른 희소성의 가치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반해서 NFT아트는 과거와 다르게 디지털 포스트-신세대, MZ세대의 디지털사물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차이로 전례 없는 디지털아트의 호황으로 디지털 르네상스기에 접어들게 하였다.

Nam June Paik,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1995, fifty-one channel video installation (including one closed-circuit television feed), custom electronics, neon lighting, steel and wood; color, sound,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artist, 2002.23, © Nam June Paik Estate
Nam June Paik,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1995, fifty-one channel video installation (including one closed-circuit television feed), custom electronics, neon lighting, steel and wood; color, sound,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artist, 2002.23, © Nam June Paik Estate

# 디지털 포스트-신세대

디지털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의 전환

예술가/감상자/ 대안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NFT아트를 화제적 이슈로 만든 비플의 디지털아트가 보여준 사상최고의 판매가격, 뱅크시의 트윗영상을 주목하게 된 우리의 경로는 소셜미디어가 그 출발선상이다. 백남준의 <전자고속도로: 미국, 알래스카, 하와이>(1995)에서와 같이 51채널 비디오가 네온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환경을 실제 우리는 SNS, 유튜브, 인터넷, 각종 네트워크망으로부터 한 손에 매일 장착된 우리의 스마트폰에서 대량생산소비-정보를 전달받는다. 소위 대안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NFT아트는 문화산업의 형태로 안착하며, 기술-소비자본주의 시스템과의 매칭의 절묘함을 보여준다. 미디어의 전략적 홍보/투자/가격으로 이를 주목시키는 생산/유통/소비/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판로가 자연스럽게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는 현장이 된 것이다.

# 리얼리즘? 기술-소비자본주의 시스템의 적용?

제도권미술 안팎의 모순, 불평등 비판

변화!, 태도로부터(...) 예술이 되다.

1980년경 ‘현실과 발언’이 제도권미술, 소외된 삶, 부조리 현장, 폭력의 실상을 고발한 역사적 시기가 있었다. 민중미술로부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 그리고 시대정신과 사회적 환경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리얼리즘의 시대였다. 그리고 40여년이 지난 디지털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현재의 사회적 환경은 기술-소비자본주의 시스템이 적용된 NFT아트가 또 하나의 리얼리즘을 알리며, 변화를 시도한다. 디지털세대의 반란의 중심에 선 MZ세대가 제도권미술 안밖의 모순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태도는 민중미술의 방향성과는 시대적으로 경험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간극은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사회를 투영하면서도 디지털감수성과 경험을 토대로 예술적 실천을 시도하고자 한 태도는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문화혁명을 꿈꾸는 디지털세대, 이들은 감상자의 측면에서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문화를 생산/소비/유통/하는 넷워크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참여와 소통을 활성화시키는데 주도적이다. 비대면과 온라인 관람/홍보/좋아요/에 익숙하면서, NFT아트로 온라인전시 관람만큼, 개인의 공간에서 예술가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유통구조와 시스템으로 개인의 취향과 선택에 비중을 둔다. 19세기 사진의 등장 이후로 이미 오래전 논의된 작품의 아우라의 원본/복제본을 언급하기에는 급격하게 변모한 디지털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의 태도로부터 사물(대상)은 예술이 될 수 있다. 감상자의 성격/계급/문화수준/등을 구별해야 할 필요도, 제도권의 미적취향에 맞추어, 예술가가 특유의 개성을 살릴 수 없는 현장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신장,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이다.

# 온라인의 알레고리!, 인간소외 현장,

인간실존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블루칼라 노동이여.

하지만 정작 우리가 간과한 것들이 있다. 온라인이 만들어낸 알레고리, QR코드, 링크로 연결되는 대상의 스펙타클의 시각적 화려함에 빠져 ‘소외된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술가의 노동(Labor/work)의 비중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예술가가 창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투영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는 보통, 블루칼라, 흔히 육체적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신체적 행위를 토대로 창작활동을 펼친다.3) 그리고 현재 예술가의 역할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을 맞이하며, 변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제도권 안팎에서 보는 NFT아트가 무엇인가에 대한 부정적인 회의론, 원본성의 아우라와 저자/소유권, 작품가격의 시장성 논쟁으로 반복될 뿐이다. 하물며 예술가의 아이디어, 창작시간/과정은 판매가격에 반영시키지 않으면서, 실상 NFT아트를 제작한 예술가의 노동, 창작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다. 예술가의 노동은 당연시되는 것으로, 재능기부, 무료봉사로 생각하는가? 디지털플랫폼 노동/업무/시간이 증가한 현실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예술가들의 창작과정/매체활용/활동량이 확대됐다는 사실은 NFT아트를 통해서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디지털기술은 비물질 노동의 ‘이면’만을 보여 주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블루칼라 노동의 의미가 더욱 드러나기 어려운 여건 속의 환경이다.

# 포스트 디지털시대, 블루칼라의 디스토피아?

인간노동, 대체물이 될 것인가?

인간노동은 육체/정신이 결합 된 행위와 활동으로 개인자본의 원천이자 근원이다. 블루칼라의 의미 역시도, 인간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제품과 서비스생산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언급되지만, 예술가의 노동 역시도, 노동력을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통한 작품을 생산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제레미 리프킨(1945~)의 주장처럼, 이미 오래전 기술적 활동을 기반으로 인간노동이 연속공정기술, 자동화 도입으로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는 현실이 더욱 가속화되는 추세이다. 예술가의 노동도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사실상 AI인공지능/사물인터넷/무인 키오스크/등은 디지털플랫폼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블루칼라의 의미를 더욱 상실시키는 경로가 되면서, “시장가치는 더욱 점점 더 하락하게 됐고, 자기 정의 혹은 사회적 기능 없이 버려지고 있다.”4) 블루칼라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이 상황으로 오기까지, 현실에서의 우리의 실존,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자발적 선택으로 우리는 기술적 활동을 하는 것인가? 인간의 삶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기계가 되려 우리를 소외시키는 현장으로 이어지며, 소모품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사실 14세기 르네상스의 시작도 인간을 위한 활동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디지털 르네상스라는 말로, 디지털아트의 새로운 전환기의 순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사회학자 하워드 S. 베커(1928~)의 말을 인용하자면, “예술작품이 존재하기 위해서 감상자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창의적 활동이 주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작품의 생산/분배/교육/비평의 구조가 순환되기 위해서 정작 예술가의 창작활동의 과정의 비중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소외는 본질적으로 그 기반을 스펙타클사회를 만들어낸 소비자본주의시스템의 풍경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태도가 예술가의 노동, 즉 인간노동을 주목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기술적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예술가의 노동도 기술적실업, 디지털-기술자본주의 사회의 소모품으로 안착하는데 기여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인간노동의 가치에 주목할 때,

이 시작을 알린 이들이 있었으니.

기술유토피아에 가려진 블루칼라의 디스토피아의 미래는 이제 개개인의 태도와 관점만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컴퓨터/인터넷이 인간의 노동을 통제한다.”는 경고성의 메시지가 기술비판론적인 시각의 논의가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 것처럼, 우리의 태도가 작품 혹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아이디어로 개인의 삶에 적용을 시키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에겐 전쟁, 세계화, 디지털사회로 도래하기까지, 수많은 역사와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한다는 2021년 7월 초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의 통과는 노동이 만들어낸 현장이다. 이 시대가 오기까지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계는 앵포르멜, 단색화, 실험미술의 예술가들의 끊임없는 창작활동/과정/시간이 함께 했었다. 과거의 창작활동의 산증인들이 만들어낸 예술가 노동의 존재론적 가치가,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은 이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가의 노동이 있기에, 작품이 존재한다.

*

디지털 공간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는 이 사회에서, 기술유토피아가 다가갈 수 없는 고유한 영역임을 알릴 수 있는, 인간노동. 디지털세대 예술가의 노동이 디지털플랫폼에 가려져, 비물질의 형태로 보이지 않는 플랫폼 노동으로 사라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일어날 수 있도록, 이제는 또 과거가 되어버린, 되어가고 있는, 이 세대의 노동의 기록과 흔적이 어떻게 정체성을 드러냈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NFT아트, 디지털 르네상스기가 단순한 블루칼라의 종말을 맞이하는데 기여하는 수단이 되지 않기 위한, 예술가의 노동을 각인시켜주기 위해서, 필요한 순간이다. 이에 창작활동과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예술’. 예술의 아우라는 원본/복제본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이제는 예술가의 노동도, 아우라속에서 두각을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하며, 우리도 그 가치를 만드는 이들이 되어가야 한다. 미술시장의 평판/전략과 작품가격으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예술가의 노동이 존재했기에,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예술가/작품/창작과정으로부터 인간노동의 가치를 주목할 때이다.__(2)에서 계속

 

※본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1년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 공모 지원을 받았습니다.


1) “작품소개서, 구매감상까지 가상공간서 펼쳐집니다.” 《경향신문》, 1996년 12월 23일.

2) 유재길, 「한국 테크놀로지 미술의 흐름과 작가들」

3) 노동의 개념은 김경일의 단행본 『노동』(2014)에 따르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실천으로서의 노동과 제작으로서의 노동으로 관조의 삶과 활동의 삶 같은 이중의 의미구조로 세분화시킬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예술가의 정신/육체, 실천/제작의 창작활동으로 노동의 의미에 주목했다.

4) 제레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이영호 역, 민음사, 2005.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