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갑질119, 콜센터 300명 설문조사 결과 발표
상담사 절반,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후 변화 X
구실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실효성 도마 위
‘산업안전보건법’ 따른 보호조치 적극 이행돼야
“고객이 물어보는 것에 대해 신속하게 응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도 모르면서 왜 앉아 있느냐?’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는데도 반말하면서 ‘똑바로 일하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고객의 폭언에 대해 회사는 어떤 보호조치도 해주지 않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고객의 폭언에 상처받고 울면서 일하다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응대 불만 문제가 발생하면 재택근무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협박했습니다” -콜센터 노동자에 대한 인식 조사 보고서 中
【투데이신문 박세진 기자】 감정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정부가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센터 상담사 절반은 갑질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콜센터 상담사들은 고객의 ‘갑질’과 더불어 회사의 부당대우로 인해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도 발표됐다.
지난 2018년 국회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 이른바 ‘감정노동자 보호법’을 추가했지만 법 취지가 제대로 구현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직장갑질 119와 사무금융노조 우분투센터는 지난달 31일 콜센터 상담사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담사의 67.1%가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후에도 갑질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답했다. 회사가 상담사를 보호하고 있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비율도 60.9%에 육박했다.
고객 응대 근로자가 폭언 등 괴롭힘을 당하면 사업주가 예방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후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사 10명 중 6명 이상이 감정노동자 보호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콜센터 상담사가 겪는 부당한 경험은 △상담 중 이석 금지와 점심시간 외 휴게시간 미 부여가 39.7%로 가장 높았다. 이어 △점심시간 제한 34.2% △연차휴가 강요 33.5% △연차휴가 거부 32.3% △화장실 사용 제한 17.8% 순이었다.
전화를 받는 상담사와 전화를 거는 고객 간의 인식 차이도 크게 나타났다.
직장갑질119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상담사에 대한 부당한 민원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상담사에게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가 난 말투로 말을 한다’는 질문에 대해 상담사는 74.5%가 동의한 데 비해 국민들은 53.9%만이 동의했다. 또 상담사는 ‘빨리 처리해달라고 계속 독촉한다’, ‘대기시간, 회사 정책 등에 대한 불만을 항의한다’ 등에 관한 질문에 각각 76.3%, 76.0% 동의했다. 이 밖에도 ‘책임자를 바꾸라고 한다’ 69.8%, ‘반말이나 무시하는 투로 말을 한다’는 66.2%로 동의하며 고객과는 약 20% 차이를 보였다.
이는 상담사에 대한 부당한 민원과 관련해 고객보다 상담사가 훨씬 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유명무실 ‘감정노동자 보호법’
이렇듯 감정노동자들의 고충 해결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가운데, 고객을 응대하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 등)에 따르면 사업주는 주로 고객을 직접 대면하거나 정보통신망을 통해 상대하면서 상품을 판매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고객 응대 근로자에 대해 고객의 폭언, 폭행, 그 밖에 적정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아울러 사업주는 업무와 관련해 고객 등 제3자의 폭언 등으로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이는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보호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할 노동자들이 정작 테두리 밖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가 공공 및 민간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객 응대 업무 지침서를 분석한 결과, 감정노동자 상당수가 고객으로부터 폭언 등의 피해를 당하는 즉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언 등의 피해 이후 3~7단계에 걸쳐 자제 안내 절차를 거쳐야만 고객 응대를 종료할 수 있는 등 반복적으로 피해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지난 7월 한국노동상회연구소가 발표한 ‘감정노동 제도와 현황과 개선과제 검토’라는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한국노동상회연구소에 따르면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여러 조치 가운데 △법적조치 고지와 △안내문 부착 등의 도입 비율은 70%를 넘지만, △직원 전환 배치 △직원 업무·서비스 중지 △보호·방어권 부여 등 보다 적극적인 보호조치를 적용하고 있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감정노동자 보호 적극 이행돼야
감정노동자에 대한 허술한 법 테두리가 여실히 드러나자 전문가들은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이행 조치가 시행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직장갑질119 심준형 노무사는 본보와의 통화를 통해 “사용자는 콜센터 상담사에게 어떠한 권한도 부여하지 않고 제한된 상담만 가능하도록 만들어놓고, 자리에서 상담만 할 것을 강요하여 고객의 불만을 듣고만 있어야 하는 총알받이로 전락시켰다”며 “이는 근로계약상 최소한의 배려의무조차 콜센터 상담사에게 이행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계약 자체가 사용자가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제공받고 이 노동력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위험을 방지 또는 제거하거나, 건강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포괄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석을 금지하거나, 화장실 순번제라던가, 휴게시간 금지 등을 미뤄봤을 때 전체적으로 위험 발생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배려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상담사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업무 권한을 받지 못하기에 포괄적으로 배려위반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사실, 상담사들은 폭언을 들었을 때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엄청난 감정노동에 시달린 이후에도 쉬지 못하고 바로 전화를 받는 등 악조건 속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상담사에게 업무의 재량권이나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이런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위험을 제거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상담 노동자들이 기업의 방패막이로 전락함을 비판함과 동시에 하청 구조 및 업무의 자율성 보장 등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사무금융노조 우분투 비정규센터 김필모 센터장은 “많은 사람이 문제 해결을 위해 콜센터를 찾지만 실제 콜센터에 주어지는 권한이 크지 않아서 민원이 발생해 상담 노동자들이 기업의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며 “노동환경 개선과 더불어 상담 노동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청 구조, 업무의 자율성 보장 등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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