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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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했던 그 이름

정희정

갓 단장한 자그마한 사무실 문 앞에 선다. 오늘은 근로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통장 사본과 신분증을 지참하라고 들었다. 도장은 찾아서 들고 왔지만, 통장을 미처 복사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사무실에 복사기 하나 없을까. 설마 밉보이지는 않겠지. 가벼운 긴장감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초인종을 가볍게 한 번 누른다.

“오셨어요?”

사장이 친히 문을 열어준다. 사무실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나와 함께 채용된 누군가가 앉아 있다. 안내해 준 자리에 앉고서 나는 조심스럽게 통장 복사를 부탁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통장을 가져간다. 기다리는 동안 약간의 고요함과 침묵이 사무실 안에 내려앉는다. 하얀 벽과 함께 파란색 큰 수납함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도 파랑. 푸르게 짙은 그 색 앞에서 나는 푸르게 넘실대던 바다를 기억해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환자의 몸이었던 그때, 내가 남편과 머물던 곳도 푸른 바다 앞이었다. 나는 병원 응급실, 항암 병동, 이식 병동의 무균실을 차례로 거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세먼지 예보 앱에는 연일 해골 그림이 나타났다. 산책조차 할 수 없었기에 공기 맑은 바닷가 앞 작은 월세를 빌렸다. 넓지 않은 베란다 통창으로 바다는 커다란 풍경화처럼 걸려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바다가 넘실댔다. 햇살이 좋으면 얕은 바다에서부터 깊은 바다까지 다채로운 푸른빛으로 일렁였다. 병을 이겨야겠다고 마음을 먹다 보면 눈가에는 잠깐씩 물이 비쳤다. 바다는 옅은 하늘빛에서 짙은 파랑으로 깊어졌다.

아프기 전, 내게도 일터가 있었다. 부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쪽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가 내 책상이었다. 일에 몰두하다가도 창밖에 햇살이 내리면 그 빛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한때 환한 빛을 받으며 그곳에 있었다. 부서 조직도에 있었을 내 이름은 병원 입원실에, 그리고 집 우편함에 갇혔다. 항암을 하며 몸의 근육과 살도 잃었다. 내 이름은 투명해졌다. 보호자 없이는 밥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차츰 목소리의 힘도 잃어가는 듯했다. 지난 시간이 밀물처럼 내게 밀려 들어왔다.

“여기 계약서 양식인데 보시고 이상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통장은 복사했습니다.”

사장이 내 통장과 함께 계약서 서류를 내게 건네준다. 종이에 인쇄된 내 이름이 보인다. 병을 이겨내겠다고 울먹이고 뒤척였던 감정의 잔가지들이 계약서에 반듯하게 인쇄된 내 이름을 보자마자 썰물처럼 물러나간다. 통장을 가방에 넣은 후, 가방 깊숙한 곳에서 한동안 세상 빛을 보지 못했던 도장을 꺼낸다. 멋진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이 물건도 벌써 열 살을 먹었다. 두 번째 손가락만 한 기다란 원통형 몸체는 투명해서 ‘크리스탈’, 고무인은 인주나 잉크 패드 없이도 계속해서 만 년 찍을 수 있다고 ‘만년’, 그래서 크리스탈 만년 도장이었다. 소재는 아크릴이겠지만 내 눈에는 크리스탈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내가 한창 일하던 그 시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까. 내 인생이 영롱하게 빛나던 때였다.

교직이란 업은 도장 찍을 일이 참 많았다. 어떤 종이에든지 이 밑동을 지그시 누르면, 내 이름이 붉은 동그라미 안에 말끔하게 가두어져 나왔다. 시험지에, 답안지에, 각종 동의서나 확인서에 내 이름을 무수히 찍어냈다.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붉은 동그라미 안에 내 책임감이 한 움큼씩 찍혀 나갔다.

오늘 여기서 이 도장을 찍으면 앞으로 적잖은 게 달라진다. 통장에는 회사의 이름으로 얼마간의 액수가 들어올 것이고, 내게 새로운 호칭이 생긴다. 계약서 안의 촘촘한 글자를 찬찬히 훑어나가는데, 이런, 집 주소가 틀렸다.

“여기, 제 주소가 아니네요.”

잠시 나아갈 길이 막힌 도장을 탁자 위에 둔다. 마주 앉아 있는 채용 동기는 말이 없다. 한낮의 빛을 받아, 숨어 있던 흠집이 도장 표면에 무수한 실금으로 드러난다.

이 회사에서 채용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한 일은 도장을 찾는 일이었다. 과거를 봉인한 듯이, 부서 책상 짐을 몰아넣은 상자 안에 이 물체는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뚜껑을 열자, 흘러간 시간은 이미 도장의 한 귀퉁이를 허물어 놓은 뒤였다. 고무인 한쪽이 문대어지며 닳았는지 덜 잘려 나간 손톱 부스러기처럼 매달려 있었다. 꼭 검붉은 피딱지 같았다. 허물어진 건 내 몸도 마찬가지였다. 항암 이후 지금의 몸무게를 만들기까지 내 입술, 위, 장, 항문에 이르는 온몸의 점막은 헐리고 다시 만들어졌다.

예리한 칼날로 고무인 모서리의 부스러기를 살짝 잘라냈다. 다시 종이에 찍어봤다. 감쪽같았다. 항암 때문에 투명해졌던 내 머리칼과 속눈썹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은 감쪽같다. 푸른 바다가 시간을 들이며 나를 북돋아 준 덕택이다. 이제 내 몸은 제법 원래의 빛과 형태를 되찾아가고 있다.

“수정했습니다. 읽어보시고 여기 찍어주시면 됩니다.”

사장이 내 앞에 계약서를 다시금 내어놓는다. 이제 찍을 일만 남았다. 아득한 옛날 옛적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토판을 이용해 자신의 표식을 찍었다고 한다. 도장(stamp)의 가장 첫 순간이다. 자기 표식을 그림으로 정하고 최초로 찍어 누른 그 누구의 마음이 지금 나와 같을까?

고명딸인 이 손주가 귀하다며 할아버지께서 손수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지어오셨다는 내 이름 석 자, 나는 내 표식으로써 기꺼이 이를 택한다. 푸른 바다가 시간을 들여서 되살린 이 몸으로, 살아있는 내 이름을 꾸욱-.

‘(인)’이라는 글자 위로 붉은 이름이 순식간에 돋아난다. 피딱지가 앉은 후에 새로 돋아난 이름이다. 붉은 원 안에 오밀조밀하고도 균형 있게 자리한 내 표식이다. 이름을 찍는 행위는 ‘내 것’이라는 의미다. 소유는 곧 책임이다. 도장을 찍는 일은 곧 내 이름으로 행해질 모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다. 한동안 투명했던 내 이름이, 무쇠를 녹이는 짚불처럼 발그레하게 색을 얻어낸다. 내 이름은 만 년 중에 고작 열 살을 채웠을 뿐이다. 내 앞에는 아직 구천 구백 구십 년이라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남아 있다. 최초의 도장 사용자였던 기원전 그 누구의 첫 마음을 잊지 않기로.

다시 시작이다. 마주 앉아 있던 채용 동기에게 처음 입을 뗀다. 가벼운 미소를 담아서 말한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이름 앞에 새로이 놓인 이 길이 반갑다.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 세상에도 인사를 해본다. 앞으로 잘 부탁해!

■ 당선 소감 / 정희정(여. 1983년생. 프리랜서) 

△ 수필 부문 당선자 정희정<br>
△ 수필 부문 당선자 정희정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날들은 제가 알던 일상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제 이름은 세상 속에서 빠져나왔고 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글을 써야겠다.‘ 시작은 일기였습니다. 무척이나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로부터 말미암아 제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므’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내고는 했습니다. 넓적하게 생긴 독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궁궐의 소방수(消防水)를 담아 두던 큰 독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담겨있다고 합니다. 드므에 담긴 물을 바라보듯이, 저도 제 안에 담긴 마음을 부단히 들여다보기 위해 지었던 이름입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제 마음이 바로 세워졌습니다.

제 주변에서 어슬렁대는 것 같았던 화마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는 시간입니다. 드므라는 이름에 담긴 글은 제 시선의 방향도 바꿔나갔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이라도 예사로 넘기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배우고,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솟아납니다. 일상을 사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무엇을 쓰든, 그만큼 저도 삶을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처음의 그 마음, 잊지 않고 오래도록 쓰는사람이 되겠습니다. 결이 살아있는 문장으로 여운이 남는 글을 짓고 싶습니다.

제 곁을 사랑으로 지키는 남편, 언제나 저를 응원하는 가족 모두, ‘너의 작업실’ 식구들, 매거진 2W의 필진, 용산도서관 문학반 문우들을 비롯하여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심사평 / 오은주(소설가)

수필은 그 맛을 느끼며 읽기는 쉬운 듯해도 작품으로 쓰기는 매우 어려운 문학장르이다. 수필이 수기나 일기, 고해성사에 머무를 수 없기에 수필 쓰기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자기고백적 서사 속에서 독자에게 진솔하게 전달되는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야 하는 작업이 쉬울 리 없지 않은가. 더구나 투데이신문 직장인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바쁜 직장업무를 하는 중에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사로잡았을 글감을 흘려버릴세라 붙잡고 밤에 다시 책상에 앉아 천착의 시간을 보내며 풀어냈을 터였다. 그 노고를 생각하며 선자는 더 신중하게 응모작품들의 평가에 접근했다.

예심에서는 기본적인 문장력을 갖춘 작품 중에서 소재가 참신하고 의미가 전달되는 작품들이 뽑혔고, 본심에 올라온 9분의 작품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저마다의 장점과 매력이 있는 가운데 단점도 공존했다.

당선작인 정희정의 「투명했던 그 이름」은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직장을 얻어 사회로 복귀한 여성이 전에 쓰던 도장을 사용하면서 존재를 찾는 과정을 그려냈다. 도장이라는 상징물의 도입 기법도 좋았고, 투병과정과 새로운 삶의 의지를 편안하고 격이 있는 문장으로 잘 풀어냈다. 함께 보낸 「차의 향을 닮다」도 진실한 인간적 교류에 대해서 차향처럼 잔잔하게 묘사하면서 사유의 과제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과장 없는 묘사와 안정된 문장력이 작가의 내공을 보여주었다. 담담하게 스며드는 진정성이 장점이지만, 사유를 끌고나가는 힘이나 문장이 자칫 나약함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보였다. 그 점을 경계한다면 향기를 머금은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서 당선작으로 뽑았다.

마지막까지 겨누었던 작품으로는 어진봉의 「봄날 꽃 아래 살기를」을 꼽을 수 있다. 죽음과 삶이 혼재하는 병원에서 일하며 현재를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잘 표현됐다. 수필을 쓸 수 있는 산문적인 문장력이 돋보이고 사유의 깊이는 확보했지만 너무 흔한 진실의 장면과 교훈으로 마무리한 점이 아쉬웠다.

박수현의 작품 「파일명이 없습니다」도 힘이 있고 매력적인 문장이 돋보였다. 가장의 죽음 이후 젊은 아내와 아들이 맞이한 삶을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그려내서 공감을 주었다. 그러나 작품의 중간 이후에 내용과 사유가 미처 녹아들지 못한 애매한 문장이 길게 이어진 점이 감점요인이 됐다. 산뜻한 의식과 문장력이 장점이니 수필이란 산문문학의 특성에 맞게 좀더 풀어쓰기를 연마하면 개성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 고려진, 민병식 두 응모자의 작품도 좋았음을 밝혀둔다. 당선자를 포함해 위에 언급한 응모자들은 모두 기본적인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다. 조금 더 인간과 현상에 대해 신선하고 심도 깊은 시선과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심상을 가다듬는 시간을 거쳐 좋은 수필 작가로 태어나길 기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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