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자본가인데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읽고 나서 마음이 복잡하네요. 우리 아버지가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는 건가요?”

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마르크스 <자본론>의 내용을 접한 학생 중에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본가가 회사를 운영하면서 벌어들이는 이윤이 노동자의 빼앗긴 시간, 즉 ‘착취’에서 나온다는 게 <자본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 분석대로면 아버지가 직원을 착취한다는 얘기이니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물론 마르크스 <자본론>을 오로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연구서로 받아들인다면, ‘착취’라는 단어를 가치중립적 개념어로 이해할 여지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여유와 넉넉함은 자본가라는 존재가 제삼자일 경우에나 가능하다. 부모가 자본가인데? 일단 통념적으로 ‘착취’라는 단어의 어감이 상당히 부정적이라, 부모보고 몹쓸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수 없다. 그런 이에게 ‘맞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착취, 빈부격차, 환경파괴,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이윤 지상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고 인류 사회를 더욱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가 개인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내 친구나 지인 중에도 회사를 운영하는 자본가가 있는데, 그들에게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하며 사냐고 비판하지 않는다. 솔직히 사업해서 돈 버는 게 만만한 일이라면 누구나 하려고 하겠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잘되면 큰돈을 벌기도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직원들에게 지급할 월급 마련도 버거워 전전긍긍하며 빚을 지기도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따져 보자. 먼 조상들이 살던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지금보다 훨씬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의 왕이나 정승, 양반을 싸잡아 몹쓸 인간이라고 욕하는가? 어떤 역사가가 그렇게 말한다면 편협함과 일차원적 식견으로 인해 매서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왕이나 정승, 양반 중에서도 공동체 성원이 두루두루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능력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들이 있으며, 그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받는다.

나는 미래지향적 사회주의자이지만 어쨌든 자본주의라는 현실의 중력장 안에 발 딛고 산다. 더군다나 내가 극복하려는 것은 불평등과 차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이지 특정한 자본가 개인이 아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인물을 멋대로 재단할 수 없듯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사회주의)의 잣대로 애먼 자본가 개인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물론 못된 자본가는 예외다). 그 옛적 왕도 폭군과 성군으로 나뉘듯이 현대의 자본가 중에도 상대적으로 나은 자본가와 못된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자본가들이 윤리적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조성하면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만, 그것은 번지수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좋은 왕이 나올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조성하면 신분제 사회가 잘 운영될 수 있으니 다시 신분제 사회를 돌아가자고 누군가 주장했다 치자. 그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얘기이겠는가.

내가 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유는, 그게 인류가 더욱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왕이 성군인지 폭군인지에 따라 사회의 거대한 영역이 좌지우지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듯이, 소수의 독점 자본가가 사회적 재원의 상당 부분을 배타적으로 통제하며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온갖 미사여구로 그 본질을 가린다 한들, 자본주의란 결국 대다수 노동자를 소수 자본가의 지배하에 두는 경제적 독재 시스템일 뿐이다.

그 옛적 천하의 토지가 왕의 소유물이고 천하의 신하가 왕의 신하라는 왕토사상이 왕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동원됐듯이, 공장과 회사가 자본가의 소유물이라는 자본주의적 소유권 사상이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인데, 어쩐지 현실 자본주의에서만은 그 교훈들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오래전 어떤 자본가와 다음과 같은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안녕하세요. 임승수 작가님. 쓰신 책을 정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아이고! 읽어주시니 제가 감사하지요.”

“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인데요. 지역 중소기업 사장들 모임에 작가님을 초청해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아시겠지만 마르크스 <자본론>은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를 착취해서 나온다는 주장을 담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듣다가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장들도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지요. 괜찮으시다면 일단 말씀드린 날짜에 일정 비워주세요. 내부에서 논의하고 확정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열정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인상적이어서 오래된 일인데도 또렷이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강의는 추진되지 못했다. 생각보다 반대가 심해 어려움이 있었다며 전화로 미안해하는데, 불편해하는 게 당연하니 너무 낙심하지 마시라고 오히려 내 쪽에서 위로를 건넸다. 빤히 예상되는 반대를 감수하고 그런 제안을 한 게 무엇보다도 대단하지 않은가.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혹시라도 강의가 성사되었다면 나는 무슨 얘기를 했을까?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고 들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다음 같은 얘기들을 쏟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자본가에게 축적되는 부는 절대로 자본가의 능력 때문만이 아님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거둬들인 부는, 자본주의라는 불평등한 시스템이 부여한 ‘합법적’ 착취 면허 덕택일 뿐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직원들과 회사의 성과를 일정부분 공유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노동자에게 주인처럼 일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그들도 자기 소유의 가게에서 일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인처럼 일합니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하기를 원한다면 회사 지분을 나눠주세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그러니 무리한 기대는 금물입니다.”

“월급 주는 걸 아까워하지 마세요. 노동자는 대체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한 것보다 적게 가져가고, 그들이 적게 받는 만큼 당신의 이윤이 늘어나는 겁니다. 만약 노동자가 일한 만큼 받는다면 자본가는 지금 정도로 부자가 될 수는 없어요. 사장이 직원들 먹여 살리는 게 아니고, 직원들이 사장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고맙고 미안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어느덧 이런 얘기를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자본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알다시피 메시지의 수용자가 기분이 상하면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누군가 답답한 얼굴로 ‘우리 아버지가(혹은 내가)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건가요?’라고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마르크스 <자본론>의 분석이 그렇다는 거죠. 너무 부담 느끼지 마시고 경제학 고전 강의 잘 들었다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직원분들에게 제때 꼬박꼬박 월급 넣어주시고, 소중하게 대해주시잖아요? 그러면 훌륭하신 거죠. 현실에서는 그렇게 안 하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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