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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 첫 번째 이야기

조용한 역사를 메우는 우렁찬 목소리 소유자
취향 따라 찾아가는 1호선 중고 서점 탐방가
노숙자를 치료한 의사, 비용은 ‘행복하게 살기’

1호선은 우리나라 첫 번째 개통 열차이며, 2022년 현재, 98개의 역으로 이뤄져 있다. 수도권 대중교통의 중축을 이루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대표 노선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만, 언젠가부터 1호선은 미간을 찌푸리는 존재가 됐다.

1호선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서울, 경기도, 인천, 충청남도까지 사용하는 노선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라고 표현이 됐지만, 승객들은 1호선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을 ‘1호선 빌런’이라고 명명한다

<투데이신문>은 1호선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역사로 찾아가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1호선 빌런’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출발한 여정은 생각보다 금방 본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낯선 사람의 경계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자상한 말투로 그들의 일생을 나열해 줬다. 몇 번의 대화로 ‘1호선’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오르고 내리며 함께 이동했던 혼란스러운 1호선은 알고보면 누군가의 놀이터였고,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본보는 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편협하지 않았는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시청역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박용화 할아버지 ⓒ투데이신문
시청역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박용화 할아버지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서정인 기자】 지난 11월 7일 조용한 평일 오후, 시청역 환승 거리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뿐이다. 이 고요함을 깨는 이질적인 소리는 한 할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우리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1호선 빌런을 찾은 기자는 첫 대화상대가 생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목이 터져라 시청역에 전시된 독도 모형을 보며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모형을 구경하고 있는 옆 사람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두 분은 초면이라고 했다. 역시 1호선이다.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목소리는 컸지만, 꽤 예의 바른 신사였다. 기자에게 ‘젊은이’라며 호칭을 붙이곤,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계속해서 바뀌는 대화의 흐름으로 그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오랜만에 자기 말에 경청하는 젊은 사람과의 소통을 기뻐하는 모습이 순수한 아이 같았다.

박용화 할아버지와 처음 만난 장소, 시청역 독도 모형 앞  ⓒ투데이신문
박용화 할아버지와 처음 만난 장소, 시청역 독도 모형 앞  ⓒ투데이신문

그는 영등포에 있는 중고 서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의 취미는 중고 서점 탐방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돈이 생기면 구매하고 싶은 책의 목록을 만든다.

영등포, 종각, 잠실 등 전국에 있는 중고 서점 중 제일 좋아하는 곳은 ‘부천’이다. 다른 곳은 도떼기시장처럼 사람이 붐비지만 부천 중고 서점은 땅바닥에 앉아 책만 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타이밍이 맞아 1호선 급행을 타면 금방 집에 도착하는 장점도 있다.

가끔 그는 부천에 간 김에 쭉 인천까지 방향을 틀어 동인천 자유공원에 올라 바다를 보고 온다고 했다. 혼자서 짧은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는 취미를 통해 얻은 기쁨 덕분에 평생 술과 담배에 손도 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자기 삶을 ‘순수한 아기’ 같다고 표현했다.

한강철교 위에 지하철이 달리는 모습 ⓒ투데이신문
한강철교 위에 지하철이 달리는 모습 ⓒ투데이신문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한 청년이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면이 있는 청년인지 그는 주체하지 못하는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일방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진 잠깐의 대화였지만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청년은 기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조용히 인사만 하곤 자리를 떴다. 그는 뒤돌아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에 대고 잔소리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디가! 어디가? 내가 옷 갖다줄게! 목요일 날! 목요일! 을지로에서 기다려!”

그는 청년과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곤,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나열했다. ‘그와 청년의 관계’,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던 기자는 그에게 청년이 누구냐 물으니 오히려 그는 되물었다.

“내가 뭐하던 사람이라고 했지?”

“‘요셉의원’에서 근무하던 의사요”

“그럼 저 사람이 누구겠어?”

그는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다. 1997년 영등포에 설립된 ‘요셉의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요셉의원’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제공하는 병원이다. 주로 노숙자들이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다. 을지로에 사는 그는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매일 영등포로 출근하곤 했다. 현재 의사직을 은퇴했지만, 꾸준히 노숙자를 돕고 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사를 나누던 청년은 노숙자였다. 그는 청년에게 겨울이 오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겉옷을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청년은 낯선 이가 불편했는지 약속에 대한 확답을 분명하게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노숙자들은 그들의 거취가 매번 달라지니 ‘언제’, ‘어디서’가 불명확하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그와 대화하기 전, 나름의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비타민 음료를 건넸지만, 그는 물만 마시는 자신의 취향을 이해해 달라며 예의 있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청년을 보낸 뒤 비타민 음료를 청년에게 전해 주지 못한 미안함에 반복적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큰 목소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는 뚜렷한 취향 등 당차고 밝은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시청역 2호선과 1호선을 갈아타는 환승 거리에서 마주친 박용화 할아버지 뒷모습 ⓒ투데이신문
시청역 2호선과 1호선을 갈아타는 환승 거리에서 마주친 박용화 할아버지 뒷모습 ⓒ투데이신문

그가 살아온 삶이 궁금해졌다. 개개인이 바쁘게 살아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현대 사회의 삶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했다. 기자는 그에게 어떤 계기로 노숙자들을 돕는 의사가 됐는지 물었다. 그는 한 노숙인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며 과거 회상을 했다. 노숙인은 자신을 치료한 그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명확했기에 바로 답했다고 한다.

“세상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니 참 고맙다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내 몸이 이 세상에서 최고 소중하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며 소외되고 병든 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시청역에서 대략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마주한 사람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지만,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의 평생을 잠깐의 만남으로 평가하기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는 자기 삶의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이 어디서 나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시청역 환승 거리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이목을 끌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가 왜 목소리가 큰지 이해할 수 있었던 거리 인터뷰였다. 그의 따뜻한 일생으로 내가 생각하는 1호선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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