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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잉(Being)

요즘 MBTI가 유행한다. 정식 명칭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로서, 모녀지간인 캐서린 쿡 브릭스와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네 가지 척도에 기반해 구성한 심리검사 도구이다. 설문지에 담긴 93개 문항에 대한 답변을 통해 총 16개의 성격 유형 가운데 해당하는 유형을 찾아낸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인간 행동과 관계를 이 16가지 유형에 대입해 규명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흔히 하는 말로 개나 소나 다 하는 형편이라 모르면 뒤처지는 것만 같다. 물론 대체로 재미로 하는 것일 테지만,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생학과 혈액형 유형론

내게는 이게 문제로 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혈액형 유형론의 변주에 불과하다. 각종 학문(철학 등)이나 담론(음모론 등), 그리고 여러 상품(자기계발 등)과 마찬가지로 이 조악한 유형론 또한 일본을 통해 한국에 도입된 것이다.

독일의 우생학적 풍토에서 에밀 폰 둔게른(Emile von Dungern)에 의해 시작된 사이비 과학적 주장이 여러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일본의 교육학자 후루카와 다케지(古川竹二)에 의해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다케지가 1927년에 3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펴낸 연구 논문 「혈액형에 따른 기질의 연구(「血液型による気質の研究」 )」가 혈액형 유형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유형론은 일본 최초의 방송작가 마사히코 노미(能見正比古)가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1971년에 펴낸 《혈액형으로 알 수 있는 상성(血液型でわかる相性)》에 근거한다. 고작 네 가지로 인간을 나눌 수 있다는 얄팍한 접근이나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대한 박약한 기초 등에 대해서 굳이 더 언급할 생각은 없다. 이제는 혈액형 유형론보다 좀 더 그럴듯한 심리학적 외피를 뒤집어쓴 MBTI 유형론이 새롭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MBTI와 그 신도들

방금 혈액형 유형론 형성의 역사를 표피만 살짝 훑었는데, MBTI 유형론의 경우에는 마침 《성격을 팝니다 The Personality Brokers》라는 제목의 적절한 책이 하나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격 검사인 마이어스-브릭스 유형지표의 역사를 추적하는”(6쪽) 가운데 “MBTI를 불신하는 사람, 굳게 믿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모든 이들”(26쪽)에게 말을 건네는 야심 만만한 책이다.

역사적 추적에 대해서는 여기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 내용이 충분히 흥미로우니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하지만 저자 메르베 엠레의 꽤 신선한 포지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다. 그녀는 비판자들이 “MBTI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까닭에 성격 유형을 알게 된 이들이 경험하는 놀라움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465쪽)고 말한다.

“캐서린이 육아 실험실을 연 이후로 세상은 수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자기 발견과 자기 창조를 매개하는 MBTI 언어는 여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그것과는 별개로 성격 검사로 획득하는 자기 인식이라는 산물은 귀중한 선물이며, 4X4 사이즈의 성격 유형 도표나 알파벳 네 글자로 표현되는 MBTI는 여느 성격 검사보다 수월하게 자기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로 여겨진다. […] MBTI는 그 타당성과 신뢰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그 기원과 사용 용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멈추지 않았으며, 시중에는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유통되는 유사품도 많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도구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467쪽)

이에 대해 나 역시 동의한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MBTI 신도들만의 간증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혈액형, 별자리, 애니어그램 등 다양한 유형론이 모두 (규모는 다르지만) 나름의 신도들(과 그들의 간증)을 보유하고 있다. 자신을 특정한 지표로 규정하고 난 후 이에 맞춰가게 되는 라벨 효과가 작용하게 마련이다. 이는 어느 정도 시대정신과 관련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심리학의 시대와 새로운 인간 유형론

근대가 물리학의 시대라면, 현대는 심리학의 시대이다. 근대는 연구 대상을 과학적 통제의 방식으로 지배하고자 했다. 뉴턴의 물리학(고전역학)과 칸트의 철학(관념론), 밖의 자연과 안의 의식(意識)이 정태적이라는 면에서 궤를 같이한다. 반면 현대는 심리적 치유의 방식으로 관리하고자 한다. (에바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에서 잘 정리한 것처럼) 기업의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격을 팝니다》의 서문과 결론에 등장하는 MBTI 강사 패트리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기업에서 경영이라 함은 곧 참여적 관리경영을 말합니다. 예전처럼 지시하고 명령하는 통제경영 방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459쪽)

내가 보기에 현재 대중에게 가장 주목받는 심리학은 두 가지, 즉 융의 심층 심리학과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이다(융과 아들러 모두 프로이드의 제자들인 동시에 배도자들이다). 개인심리학은 의식 영역에 특화된 심리학(아들러는 트라우마 개념을 거부한다)으로 코칭과 자기계발에 널리 활용된다. 심층심리학은 무의식 영역에 특화된 심리학(특히 공시성과 집단 무의식 개념을 통해 신비주의에 친연성을 보인다)으로 영성과 대중문화에서 널리 활용된다.

오토 크뢰거에 따르면, “심리학 이론의 세계에서 80년대는 카를 융의 시대였다.”(440쪽) 그리고 아마 90년대는 아들러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물론 이는 서구와 일본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경우는 10-20년 정도 차이를 두고 따라가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제 요즘 MZ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MBTI 유형론(사실 이십여 년 전에도 상당한 주목을 받은 바 있다)을 통해 융과 심층 심리학이 다시금 대중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심리 유형론과 사회구조의 변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의 유형론은 심리학의 시대, 혹은 달리 말하면 자기애의 시대를 반영하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는 물론 사회의 변화를 뜻한다. 심리 유형론의 유행과 시대 변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에 따르면 성격 유형 이론이나 사람들을 분류하는 도구는 이 세태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사회가 현대화되면서 급속히 퍼진 심리적 질병으로 인한 증세였다.”(233쪽) 아도르노가 말하는 바는 결국 사회가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 유형을 찾으려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미 유형에 따라 구분되고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 유형 이론을 비평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19세기 철학에서 규정하는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 한 번도 개인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234쪽)

이렇듯 현대 사회가 요청하는 인간 유형 형성의 핵심 기제(mechanism)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재밌게도 아도르노 자신이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몇몇 유형 이론은 희미하나마 자아에 관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235쪽) 심지어 그 스스로가 잠재적 파시스트를 파악할 목적으로 설문지를 설계하고 “자신이 만든 검사 체계야말로 이상적인 유형 분류법의 적절한 사례라고 여겼다.”(235쪽)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그러므로 MBTI를 비롯한 여타 인간 유형론들이 인간(자기와 타자) 이해와 치료를 위한 완전한 도구로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MBTI는 온전한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이 미래는 신실한 신도들에 의한, 신실한 신도들을 위한 세상이다.”(468쪽) 상품화를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완전한 유형 분류법은 존재할 수가 없다. 눈송이조차도 제각각 다른 마당에 인간 영혼의 색조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유형론은 대단히 불완전한 도구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다면, 나름의 유용성을 거부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리고 메르베 엠레 또한 《성격을 팝니다》에서 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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