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 12월 12일 월요일

오늘 읽은 책은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이하 <드러내지 않기>)이다.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왜 자기 존재를 감추거나 사라지는 기술이 필요한가? 자기 은닉의 기술은 자기 존재를 알리거나 포장하는 기술과 대비된다. 어떤 의미에서 둘은 빛과 그림자처럼 상호 의존의 관계다. 가령 SNS 등을 통한 자기 표현의 압력이 점증한다면, 그 피로감으로 인해 자기 은닉의 필요가 제기될 것이다.

도시화 속의 개인

자기 표현과 자기 은닉 양자는 도시화(urbanization) 과정의 부산물이고, 도시화는 책의 기본적인 배경이다. 그러므로 이제 도시화라는 것에 대해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는 시골과 대비된다. 도시의 개인주의적 정서는 시골의 공동체적 분위기에 대비된다. 후자의 상황에서는 이웃집 수저 개수까지 모든 게 공개된다. 여기서는 공동체의 전통이 개인의 판단에 우선하며, 공동체의 전통에 대한 존중이 개인의 고유한 자아 형성에 선행한다.

반면 도시로 이주한 경우는 이와 정반대된다. 도시 이주는 고향(공동체와 전통)이라는 이름의 뿌리로부터 뽑혀나오는 경험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존의 자기를 구성한 모든 것이 해체된 상황이기에 오로지 개인으로 존립하게 만든다. 이게 바로 자기계발(self-help)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자기를 관리(경영)의 대상(즉 인적 자원)이자 홍보(마케팅)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소서는 그저 일차원적 예시에 불과하다.

기존의 이해를 따르자면, 도시화와 군중의 등장, 그리고 군중의 익명성을 병렬 관계에 둬야 한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당장 나만 해도 옆집 상황을 잘 모른다(아들딸 하나씩 둔 단란한 네 가족이라는 것만 알 뿐).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고독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다. 더욱이 이런 익명성과 군중이 결합된다. 시위, 콘서트, 정치집회 등이 열리고 여기에 군중이 몰려서 열광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인해 익명성을 두려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버드의 신학 교수 하비 콕스는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문제작 <세속 도시>을 통해 도시의 익명성을 개인의 해방으로 재해석했다. 처음 읽을 때, 나는 그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대도시의 익명성이 주는 자유가 좋았다. 하지만 <세속 도시>의 주장은 진실의 절반일 뿐이다. 완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기 표현과 자기 은닉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기 표현과 자기 은닉 양자는 도시화 과정의 부산물이다.” 도시의 익명성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이는 도시 거주자에게 자기 표현의 부담을 뜻한다. 즉 도시에서 생존(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자기 홍보가 필요하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자기 표현의 부담감은 가중되고, 이로 인한 피로감도 급증하게 된다. 이게 바로 <드러내지 않기>가 주목하는 부분이다.

“이 시대의 현대성은 자신을 드러내며 인정받고자 하는 광적인 투쟁뿐 아니라, 익명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은밀한 투쟁, 좀 더 차분하지만 실로 완강한 투쟁으로도 특징지어진다.”(16-17쪽)

종종 현대성과 근대성을 나눈다. 근대를 모던으로, 현대를 포스트모던(탈근대)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의 현대는 어느 정도 외견상 중세로의 회귀로 해석한다. 세계를 온라인 기술로 결합시킨 초거대 촌락(global village)으로 보고, 많은 현상을 이러한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제기 하에서는 근대성이 곧 현대성이다. 이는 모던과 하이퍼모던의 구도로 보면 된다. 후자는 매체의 발달로 근대의 정신이 극도로 심화된 초(超)현대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의 문제화 덕분에 누구나 ‘15분은 유명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워홀의 꿈에는 현대 사회의 대중화와 익명화에 힘입어 누구나 ‘15분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라는 익명성의 꿈, 다수가 공유하는 이 꿈이 상응한다. 이꿈들은 서로 모순되는 별개의 꿈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시대의 두 얼굴로 봐야 할 것이다.”(17쪽)

자기 은닉의 전제

문제의 원인(why)이 규명된다고 문제 해결의 방법(how)이 저절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방법에 대해서는 별도로 모색해야 한다. 더욱이 저자 피에르 자위부터가 ‘드러내지 않기’가 극히 힘이 들고 어려운 경험이라고 평가하는 실정이다. 또한 그 연원과 경과를 살펴보기 위해 계보학적으로 연구한다. 특히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 비추어 본 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의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은 일부 일신교 신학의 토양에서 태어났을 것이다.”(118쪽)

파리 7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피에르 자위의 역사적 추적 작업은 흥미롭지만, 그럼에도 이게 과연 필요했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자기 은닉은 본질적으로 도시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자기 은닉 트렌드를 고대의 종교적 산물(아퀴나스의 겸손, 카발라의 침춤-존재의 위축-, 에카르트의 초탈 등)의 세속화로 보기보다는 애초부터 근대의 심리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명도 나의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드러내지 않기는 이렇듯 널리 퍼져 민주화되고 정치화되었다. 이제 드러내지 않기의 경험에 종교적 배경은 필요치 않다. 드러내지 않기는 도시의 경험, 도시 안에서의 경험이 되었다.”(119쪽)

그렇다면 자기 은닉을 종교적, 신비적 맥락에서 규명할 필요가 없다. “드러내지 않기의 기원과 모델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현대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이다.”(152쪽) 즉 도시의 군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군중은 견고한 대상이 아니라 유동적 상태다. 이러한 성격(유동성)은 행복에 대한 기존 접근(소유냐, 존재냐)을 거부한다. 즉 외적 재화의 축적도, 내적 자아의 확립도 넘어선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나는 비판적이다. 자기 은닉, 즉 사라지기를 실천하려면 견고한 내적 자아가 확립되어야 한다. 심지어 아퀴나스가 말한 종교적 겸손이나 카발라가 주장하는 침춤(위축), 에카르트가 말한 초탈조차도 자아의 확립이 전제된다. 비우려면 먼저 채워야 하고, 낮추려면 우선 세워야 한다. 이는 저자가 결론에서 강조하는 자기 은닉의 동기이자 표현이 되는 항목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주장이 바로 나의 판단을 외려 지지한다.

피에르 자위는 자기 은닉의 이면과 표면에 사랑이 자리한다고 천명한다. 첫째로, 사랑은 자기 은닉의 동기(질료)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사랑에 적절한 모습을 부여하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게 처신한다.”(163쪽) 둘째로, 자기 은닉이야말로 자유로운 사랑의 유일한 형상(표현)이다. “드러내지 않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진실한 사랑은 드러내지 않는 사랑일 뿐이다.”(167쪽) 이 두 측면에서 간과된 것은 사랑의 주체 확립의 필요성이다.

자기 은닉의 방법

저자는 “드러내지 않는 영혼들은 세계의 기초”(170쪽)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아마도 현실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이해하는 듯하다. 퀴즈쇼나 리얼리티 쇼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시청자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대중 아니면 주인공으로만 환원된다고 믿게 한다는 것, 그건 추하다.”(170쪽) 그러니까 대중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닌 제3의 존재로서 내세우는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세상 자체도 없을”(171쪽) 것이다.

하지만 이미 책에서도 다루듯이 군중의 익명성이 자기 은닉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중의 일원임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이게 바로 해방의 단초가 된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저자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논의에 깊이 천착한 반면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등한하게 취급했다는 한계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해법은 대중 속에서, 즉 대도시 속에서 존재를 은닉하는 것이다. 가령 미국의 증인보호 보호그램의 토대가 바로 도시의 익명성 아닌가?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대도시의 군중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자리매기더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더욱이 온라인 세상(멀티버스 등)에서 새로운 자아를 –심지어 복수로- 창조하고 영위할 수 있으니 자기 은닉의 가능성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얼마든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제안들을 내놓을 수 있는데, 본서에서는 찾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처음에 본서를 택할 때 기대한 바(자기를 은닉할 수 있는 구체적 기술)와 저자가 실제로 논하는 바(자기 은닉의 역사적 계보학과 철학적 정체성 탐구)는 엇갈리고, 심지어 저자의 해석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견해 또한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토론에 부칠 수 있는 해석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러내지 않기> 또한 더 넓고 깊은 사유를 위한 마중물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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