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책짓는 아재]<br>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 4월 18일 월요일

독서는 노동이다. 노동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공존한다. 독서 또한 그러하다. “독서 자체를 부정적인 행위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읽는 행위도 긍정적으로 본다.

독서의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그러니 읽는 과정이 괴로워도 참고 읽고자 스스로 결단한다. 혹은 그렇게 타인에게 독려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독서의 괴로움이 독서의 즐거움을 압도한다. 책을 읽는 이가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독서가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독서의 즐거움은 독서의 괴로움보다 크다. 물론 독서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종결에 이르기까지 매순간마다 경험하고 감각하는 바는 다르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비율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하지만 각각의 총합을 합산하면 그렇다.

독서의 괴로움은 대체로 상수(常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독서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습관을 들여야 한다. 독서가 제2의 천성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더라도 독서 근육을 단번에 키울 수는 없는 법이다. 꾸준한 습관을 들여야 괴로움을 이길 수 있다.

독자 문제에서 저자 문제로

하지만 독서의 괴로움이 독서하는 이의 문제, 즉 독서 역량(독서 체력)으로 온전히 귀속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저자 혹은 역자의 문제일 경우도 상당히 많다.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쓰기는 쉽지만,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결국 글의 난이도는 다루는 내용의 난이도 못지않게 저자(혹은 역자)의 언어적, 사고적 역량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책의 난이도에는 독자가 느끼는 주관적 측면도 있지만, 저자로 인한 객관적 측면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후자가 선행한다. 시간적으로만 아니라, 해결을 위한 우선순위에서도 그러하다.

지비원 작가는 바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왜 읽을 수 없는가』의 “들어가며”, 즉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주된 관심 대상을 이렇게 말한다.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19쪽)

독자에게 문이 되는 글, 독자에게 벽이 되는 글

왜 어떤 글은 읽을 수 있고, 어떤 글은 읽을 수 없는가. 이 간단하지만 엄중하기 그지없는 질문은 방금 인용의 출처인 서문의 제목이다. 안 읽히는 글은 대체로 불친절하다. 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사전 지식이 많아야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면, 당연히 일반 독자를 배제하게 된다. 독자에 대한 접근방식이 엇나간 것이다. 지비원은 바로 이 점에 대해 주목한다.

가령 이택광 교수의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 대한 비판(78-82쪽)은 그런 맥락에서 작성된 것이다. “‘가이드’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 제목에 이끌려 들어왔다가도 곧바로 책을 덮게 만들 만큼 [독자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갖춰야 하는] 이 전제는 거대한 벽을 치고 있다.”(82쪽) 해당하는 부분의 마지막 문장이다. 글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여주는 문이 되어야 한다. 제목에 ‘가이드’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더욱 그래야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는 독자에게 벽이 되는 글이다.

엄기호 작가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 대한 비판(88-91쪽)도 마찬가지다.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아렌트와 바우만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시 이 ‘글’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독서의 선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91쪽) 선지식이 당연히 요구되는 학술서와는 다르게 교양서에서는 이 지점에서 독자를 더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고민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어서 엄기호 작가의 책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번역된 개념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과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푸코적 개념을 통해 언어 간 번역(불어→한국어)만 이루어졌을 뿐, 언어 내 번역(학술어→일상어)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다. 전자는 군주가 백성의 생명을 얼마든지 앗아갈 수 있다고 하는 점이 강조되는 고대의 권력을 가리키고, 후자는 국가가 시민의 생명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위생과 복지, 통계 등) 방식으로 작동하는 근대의 권력을 지칭한다. 이게 설명이 충분히 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용되면 당연히 독자의 멘탈이 나간다. 한국 독자에게 도달하기 위한 새 번역(언어 내 번역)이 필요하다.

일본 인문학의 빛과 그림자

비지원 작가는 한국의 인문서(번역이든, 집필이든)를 구성하는 언어의 근간이 되는 일본어 유입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게 다룬다. 가령 정치, 사회, 문화, 철학 등 우리가 아는 많은 어휘들이 19세기 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어와 분리된 인문학이 과연 가능한가? 사실 이런 어휘들이 생성된 맥락도 모른 채로 우리는 사용해왔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사유가 그만큼 허술해지는 부분도 있다.

흥미롭게도 ‘읽을 수 있었던’ 책의 사례를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모두 일본 작가들의 저작만 다룬다. 문자 그대로 일본 인문학이 한국 인문학에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저자가 현역 일본어 번역자이라 일본 책들을 골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한국 인문학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시그널 같은 것으로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일본의 (인문학을 넘어서) 문화 전체에 크게 의존해왔던 한국의 현실 말이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문제의식만으로도 가치 있는 책

『왜 읽을 수 없는가』는 총 네 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책이지만 편집자이자 번역자로서 갖게 된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단지 문제의식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논의가 조금 부족해 뒤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진다. 물론 각각의 내용들은 모두 의미가 있지만, 넓은 시야로 전체를 살펴보면 구성상 취약하다. 특히 일본어 문제를 다룬 3장은 굳이 여기서 다루지 않아도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책의 볼륨을 더 키우고, 더 많은 내용을 다룰 때에나 적절할 듯하다).

물론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을 구체화시킨 부분은 좋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인문서적의 어려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싶다면, 살펴보기를 권한다. 지비원 작가의 후속 작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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