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금요일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가 쓴 《해피 크라시》를 읽다.

사랑을 탐구하는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책은 이미 여러 권 소개되었다. (오프라 윈프리 현상을 다루는 책을 제외하면) 《감정 자본주의》,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은 왜 불안한가》, 《사랑은 왜 끝나나》 등 국내에 번역된 거의 모든 작품이 사랑을 다룬다.

그런데 마침내 그녀의 탐구 주제가 방향을 틀었다. 물론 기존 연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저작은 더 이상 연애, 섹스, 결혼, 사랑 등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신작 《해피크라시》는 문자 그대로 행복에 집중하고, 우리가 행복학(happiness studies)과 행복 산업 등을 통해 통제되는 상황에 대해 분석한다(원제도 Happycracy이다).

행복 추구의 이중성

‘들어가는 말’이 압축적으로 논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에바 일루즈는 윌 스미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행복을 찾아서>를 소개하고, 실제 모델인 크리스토퍼 가드너에 대해 다룬다. 가드너가 행복을 각자의 책임이라고 천명하는 동시에 자기와 같은 전문가들이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그녀는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모순은 자기계발 산업이 작동하는 기본 구조와 일치한다. 표면에서는 스스로 성공을 감당해야 하는 주도적 책임을 강조하고, 이면에서는 (자기계발 상품을 판매하는)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의존적 태도를 조장한다.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넘어서 본질을 따져보면, 에바 일루즈가 관심 갖는 초점이 자기계발에 있다. 이는 《감정자본주의》의 1장(“호모센티멘탈리스의 탄생”)에서 다루는 내용과 겹친다. 그녀는 이미 거기에서 기업과 자기계발의 만남에 대해 파고든바 있다. 즉 《감정자본주의》의 후속편, 혹은 최소한 그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행복을 정조준하는 사회학적 비판

에바 일루즈는 행복학, 특히 이를 대표하는 분야인 긍정심리학을 비판의 과녁으로 삼는다. 그녀의 비판은 비판사회학자로서의 자기 포지션을 명확하게 반영한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긍정의 배신》에서 바바라 에런라이크가 웃음과 비판을 버무려 소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하지만 《해피크라시》는 차분한 관찰과 방대한 조사를 사회학적 맥락 속에서 제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에바 일루즈는 행복학과 행복 산업을 더 깊고 넓은 맥락 속에서 조망한다. 이러한 조망의 렌즈는 “행복 추구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양상의 관계”로 향한다. 즉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행복 강박을 통해 새로운 정치, 새로운 통제, 새로운 경영, 새로운 의사 결정 등이 대두되는 양상을 관찰하고 정리한다.

행복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행복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조명하는 《해피크라시》의 2장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에바 일루즈는 실증과학의 외피를 뒤집어 쓴 긍정심리학의 강경한 개인주의적 전제들을 보여준다. 개인(의 능력과 가능성, 그리고 책임)에만 초점을 두는 이 학문 영역은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만족(행복 성취)보다 불만족을 얻게 할 확률이 높다.

“확실히 이제 행복은 강박, 역효과를 내는 선물이 되었다. […] 시계를 찬 사람이 사실은 시계, 다시 말해 시간에게 주어진 선물인 것처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실제로는 행복의 지배를 받는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나 역시 마찬가지다.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자기계발은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성공을 추구하지만, 거시적으로는 사회의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미시적 목표(성공)를 추구하는 욕망을 통해 거시적 목표를 성취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모순의 작동 기제이다. 오늘날의 행복 추구는 날로 성장하는 시장과 소비지상주의적 생활양식을 공고히 하게 만든다. 뒤집어 말하자면, 행복학과 행복 산업은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만큼 외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행복은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 행복이 여전히 삶의 목적일 테지만, 원래 행복은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갈 때 주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행복은 목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삶의 방향 혹은 가치이다.

책의 헌사를 보면, 에바 일루즈의 아버지는 “행복보다 정의를 중시하셨던” 분이고, 자녀들은 그녀에게 “행복보다 더 큰 것을 주는” 존재다. 행복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본서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삶을 혁신하는 도덕적 목표로 남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정의와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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