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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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수요일

아브라함 헤셸의 『안식』을 다시 읽다.

다시 집어 든 동기는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책 하나의 제목이 내 눈길을 끌어서다. 『목요일은 새로운 금요일이다 – 더 적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수입을 만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법』 오래지 않아 도래할 주4일 근무의 시대를 맞이하는 방법 혹은 그 안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다루는 자기계발서적이다. 주4일 근무제를 근간으로 하는데 (그간 나온 책들처럼) 사회과학이 아니라 자기계발 범주에 속하다니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주4일 근무제가 제기하는 질문

주4일 근무제의 화두만 아니라 파이어 족의 성장 등 여러 면으로 시간관리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근무시간이 늘어서가 아니라 줄어서다. 혹은 줄이고자 해서다. 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여유가 늘어나는 상황을 마냥 반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일하게 종사하는 근무시간 외의 시간이 자기 몸값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0년 전에 제법 주목받던 책 가운데 『토요일 4시간』이라고 있다. 원래 직장에 나와 근무하던 토요일을 마냥 휴식이나 오락이 아니라 자기계발에 쓰라는 뜻이다.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주중의 과중한 노동의 반대급부로 일정한 휴식과 오락을 추구할 것이다. 가령 조기 축구회에 나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차거나 혹은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밀린 수면을 보충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시간을 낭비할 때에 그 시간만큼 자기계발에 활용하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대두된다. 근무 외 시간에 자기계발에 전념하도록 몰아가는 사회는 (성원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정말 불안전한 사회이다. 불안전한 환경을 버티기 위해 누군가는 자기계발에 전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이 어떤 경우에는 성공을 안겨주지만, 언제가 그렇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불안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는 자기계발이 자기계발 주체의 자아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4일을 마냥 반길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늘어난 휴일에 직면하여 어떤 식으로건 자기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과연 늘어나는 시간만큼 무얼 어떻게 할 것인가? 미친 듯이 독서하고 운동하며 자격증을 획득하면 되는 것인가? 무언가 하고 늘리고 쌓아가는 것이 정답인가? 그렇다면 휴일이 휴일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점에 의문을 품었다.

영적 수련으로서의 안식

그런 생각으로 집어 든 책이 『안식』이다. 불안을 증폭시키기보다 해소시키고, 자아(특히 그 중심성)를 증폭시키기보다 (더 큰 무엇에) 복종시키기 위한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진정한 안식에 있다고 본다. 지금처럼 피로를 해소하고, 수면을 보충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한 주 동안 숨 가쁜 노동과 일상 속에서 찌든 몸과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식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영성 수련이다. 영성 수련을 위해서는 기도, 묵상, 금식, 예배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방식은 다양하나 초점은 단일하다. 나를 비우고 내가 헌신할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혹은 사로잡히는 것이다(틸리히 식으로는 궁극적 관심). 나 자신을 바로 조율하고 참다운 나를 대면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대교의 영적 보고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안식을 주목하면 좋겠다. “유대교는 시간의 성화(聖化)를 목표로 삼는 시간의 종교다.”

아브라함 헤셸은 유대교 랍비이다. 마틴 부버의 후계자였으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거의 50의 나이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새롭게 영어를 배워 이주한지 십여 년 만에 써낸 아름다운 소품이 바로 『안식』이다. 헤셸은 미국에 와서 흑인 투쟁에 동참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예언자다. 하나 베트남 전쟁을 강행한 닉슨을 반대한 결과로 닉슨을 지지하던 당시 유태인들로부터 외면당했고 오래지 않고 죽었다.

하지만 그는 꼿꼿이 버티고 선 참 예언자였다. 그의 영성은 바로 안식일 준수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안식일은 삶의 막간(幕間)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다.” 그에게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만 하루)은 시간 속의 성소(聖所)나 다름없었다. “일곱째 날은 우리가 세우는 시간 속의 궁전이다.” 성소에서는 거룩한 만남을 위해 노동이 중단되어야 한다. 당연히 일체의 쾌락이나 노동을 중단하고 심신의 안정 속에서 차분히 경전을 공부할 뿐이었다. 헤셸은 이렇게 주 하루의 충실한 안식을 통해 그는 하늘과 접속했다. 하늘의 힘을 받아 그는 땅의 일에 개입하고 투쟁할 수 있었다.

만일 하늘이라는 단어의 종교적 뉘앙스가 불편하다면 다르게 접근해도 무방하다. 온전한 안식 가운데 ‘참 나’를 만난다고 하는 심리학적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한 주에 엿새 동안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애쓰고, 이렛날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힘쓴다.” 만 하루를 온전히 휴식하며 SNS만 멀리해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노동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묵상과 독서, 그리고 성찰적 글쓰기에 집중한다면 저절로 몸과 마음에 힘이 차오를 것이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주4일 근무제가 다가온다. 마냥 기쁜 소식이 아니다. 더욱 사회적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쉬는 시간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기계발의 무간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보다 차라리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낫다. 충실하게 쉬는 가운데 자기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참다운 자아와 (세상에 대응하며 만들어진) 사회적 가면 사이의 간극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헤셸의 안내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색채가 짙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만큼 아름답고 이렇게 힘 있는 안식에로의 초대장이 달리 더 있는지 의문이다. 독자분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심지어 믿는 종교가 없더라도 『안식』은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확신한다. 안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 영혼의 날이기도 하지만 육체의 날이기도 하다. 위로와 기쁨이야말로 안식일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인간의 모든 지체와 모든 기능이 안식일의 복락을 나눠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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