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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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목요일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을 읽다.

독서는 내게 있어서 존재 확인 방식이다.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더욱이 출판인으로서 독서는 나의 핵심 연구 주제일 수밖에 없다.

서가에는 독서라는 주제 아래 분류된 책들이 상당한 권수로 쌓여있다. 물론 독서에 대한 책들은 이미 일개인이 다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방대하게 출간되어 있다. 나의 컬렉션은 거기서 엄선된 것들이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그 가운데 하나로 이미 예전에 한 번 읽은 바 있는데, 이번에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새롭게 다시 집어 든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지만, 그의 본령은 보수이다. 그의 독서론이라고 할 법한 『텍스트의 포도밭』에서도 그의 보수적 포지션이 은근하게 드러난다. 그는 고전적 독법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일단 책의 기본 형식을 말하자면, 12세기 수도자 성 빅토르의 후고의 『디다스칼리콘』 해설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이 간접적으로, 즉 『디다스칼리콘』 해설을 매개로 표출되고 있다.

번역서의 전체 분량이 336쪽인데 그 중 미주가 89쪽이고, 참고문헌이 51쪽에 이른다. 이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자의 학문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뜻이다. 저자 자신은 여러 다양한 읽기 방식을 소개하고 경험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성 빅토르의 후고는 『디다스칼리콘』에서 수사의 읽기를 이야기한다. 이는 고대의 읽기 방식으로서, 오늘날 묵상이라 일컫는 것의 원형에 해당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묵상은 특정한 경전이나 주제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눈과 머리만 사용하는 오늘날의 독서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의 묵상은 (동서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경전을 소리 내어 읽거나 특정한 표현을 반복하여 읊조리는 것이다. 온몸, 특히 입을 사용하여 나직이 소리 내어 읽는 방식이다.

사실 『디다스칼리콘』은 후고의 시간대, 즉 12세기에 읽기 방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새로이 부상하는 것은 곧 학자의 읽기 방식이고, 바로 오늘날의 독서법이다. 15세기 이후 인쇄술의 등장은 이를 강화시켰을 뿐이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반 일리치는 학자의 읽기와 수사의 읽기를 대비한다. 눈으로 읽기과 입으로 읽기라고 정리해도 무방할 게다. 학자의 읽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수사의 읽기로 눈을 돌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묵묵히 눈으로 읽으며 정보만 간취하는 방식을 넘어서 상상과 사유를 전개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새로운 읽기 방식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다시금 수사의 읽기가 필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실용적 정보보다 영혼의 지혜가 요청되고, 또한 물량적 성공보다 내면의 성장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묵상이 주목받고, 낭독과 필사가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입으로 읽는 것(낭독과 암송)이나 손으로 읽는 것(필사) 모두 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정신만 사용하는 파편적이고 불구적인 독서를 넘어선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독서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읽는다면, 그저 머리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 줄 것이다. 좋은 독서는 좋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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