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9월 18일.

독서모임을 위해 『데미안』을 읽다.

『데미안』을 읽은 이는 많다. 하지만 그 사유의 근간에 관심을 갖는 이는 드물다. 이 사유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우선 작품 이전에 작가를 알아봐야 한다.

저자 헤르만 헤세는 한때 신학생이었지만, 기독교보다 동양사상이나 신비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도가적 면모이다. 해서 그의 모든 소설은 음과 양의 조화를 보여준다.

『지와 사랑』을 보라. 지성의 표상인 나르치스와 감성(사랑)의 표상인 골드문트가 등장하지 않나. 둘이 하나 되어야 한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이 하나로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데미안』도 결국 싱클레어(Emil Sinclair)와 막스 데미안(Max Demian)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마지막에 데미안이 말하듯이 싱클레어는 내면에서 그를 찾아야 한다). 또한 선과 악, 빛과 어둠, 창조와 파괴가 공존한다. 새는 알, 즉 작은 세상을 부숴야 더 큰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아브락사스를 통해 창조와 파괴가 하나 되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신적 차원을 지시한다. 바로 이 차원을 보여주고자 헤세는 데미안의 모친 에바 부인(Frau Eva)을 등장시킨다. 『데미안』에서는 셋(싱클레어, 데미안, 에바 부인)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어느날 싱클레어가 방에서 속으로 에바 부인을 부를 때, 그에게 나타난 것은 데미안이다. 싱클레어의 텔레파시에 응답하여 그녀가 직접 방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대신 보낸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아마 많은 분들에게는 다소 뜬금없는 대목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이건 하나의 알레고리다. 신비주의적 인간론에 대한 그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게다. 신비주의는 통상 인간에 대해 삼분설(三分說)로 접근한다. 이는 인간이 영혼육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분설, 즉 인간을 몸이라는 가시적인 부분과 마음이라는 비가시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입장과 매우 다르다.

삼분설의 핵심은 영과 혼의 관계에 있다. 혼은 영의 뜻을 받들어 몸을 움직인다. 영이 주인이라면, 혼이 집사(執事)고, 몸은 노예다. 따라서 삼분설의 초점은 혼의 계몽 혹은 각성에 있다. 하지만 『데미안』에서 각성의 주체는 싱클레어다. 그러니까 여기서 헤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삼분설에 기반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선다. 에바 부인은 내 안의 신성인 동시에 온 우주의 신성이다. 즉 범아일여의 사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라는 이름의 새가 찾아가는 신 아브락사스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나 역시 마찬가지다.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헤르만 헤세가 동양사상과 더불어 신지학(神智學), 영지주의 등 서구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싱클레어의 선생 피스토리우스가 전수한 가르침이나 에바 부인의 이너서클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면면을 봐도 그러하다. 사실 『데미안』에는 다른 소설보다 훨씬 더 신비주의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 성장과 정신적 자유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고 에바 부인에 이르는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데미안』은 명백히 영적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다. 더욱이 『데미안』은 원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필명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소설은 명백히 교양소설(Bildungsroman)이다. 즉 주인공 싱클레어의 내적 성장을 다룬다. 하나 헤세의 관점은 영지주의에 가깝다. 영지주의는 현실과 관계 맺는 데 문제를 유발한다. 해서 나는 그의 영성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둔다. 특히 에바 부인과 아브락사스가 결부된 측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참 자아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독려하는 텍스트 가운데 이렇게 매력적인 작품이 달리 더 있을까 싶다. 그저 젊을 때 읽을 중2병 텍스트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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