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화요일

자크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다.

무려 620여 쪽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은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쓴 일기나 편지, 그리고 저널 등을 분석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본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한 대작이다.

분량으로나 형식으로나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난해하다. 이런 책은 완전한 파악을 도모하기보다 나름의 문제의식을 따라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족하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의 자기표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가운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분할 체계에 의문을 드러낸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던 19세기 유럽의 노동자들이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이해되던 교양을 깊이 천착했다. 과연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콘 프레이크로 유명한 식품회사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시행 역사(1930년-1985년)를 다룬 『8시간 vs 6시간』을 떠올렸다. 세계대전으로 초래된 노동력의 공백을 메우고자 노동시간 단축을 실행했다.

회사의 필요에 따른 탑다운 방식이었지만, 이 결정은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자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만일 노동자 스스로가 시간을 만들어 자아실현을 추구한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

19세기 프랑스의 어떤 노동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낮, 즉 노동의 시간은 고통스런 속박이다. 자아가 실현되기는커녕 소진되고 만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는 나를 찾을 길이 없다. 그저 회사라는 이름의 기계가 돌아가는 데에 복무하는 나사 중 하나로 기능할 뿐이다.

낮에는 이렇듯 노동으로 흘려보내고, 밤에는 내일의 노동을 위해 휴식해야 한다. 이러한 순환 속 어디에도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은 밤 시간에 휴식 대신에 공부를 선택했다. 그들의 선택은 “매일매일 시간을 도둑맞는 슬픔을 더이상 견디지 않겠노라는”(9쪽) 결단에서 비롯됐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노동과 휴식의 정상적 연쇄에서 떨어져나온 이 밤들의 역사”(10쪽)를 다룬다.

그런데 이렇게 자아 실현을 추구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어떤 자아가 생성될까? 마르크스가 기대한 대로 노동자로서 각성하고 투쟁의 선봉이 될 것인가?

운동권도 학습을 한다. 그 결과로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각성하게 만든다. 즉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게 만든다. 사회 변혁을 위한 연대와 투쟁, 그리고 혁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지금 여기 소개되는 노동자들은 어떤가. 스스로 공부를 선택한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나 역시 마찬가지다.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들은 노동자로 각성하는 게 아니라 온전한 자아실현을 갈망하게 된다. 읽고 쓰고 논쟁하는 것은 원래 지식인과 지배층에 속한 역할로 규정돼 왔다. 노동자들은 이와는 다른 일, 즉 실용성을 담지하는 일에 종사해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읽고 쓰고 토론하는 가운데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부르주아의 문화를 향유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결핍을 자각하게 된다. 그들의 공부와 독서는 노동자로서의 각성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끌어낸다. 독서와 창작, 그리고 토론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만들고 드러낸다.

우리의 자아는 다층적이다. 거기에는 분명 계급적 측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구도에 자기 자리를 한정 지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참된 변화는 외려 여기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변호인>에서 대학생 진우(임시완 분)이 고문당한 이유는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어서다. 이 독서모임은 부산에서 시작한 양서협동조합을 가리킨다. 비록 그 주동자들은 운동권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교회에서 시작했던 독서운동 자체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자아의 실현을 도모했을 뿐인데, 군사정권은 두려워했다. 책을 읽고 도란도란 나누던 그들의 소박한 삶은 세상을 뒤흔드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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