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월요일

이택광의 《인생론》(북노마드)과 플래너리 오코너의 《기도일기》(IVP)를 읽다. 두 권 모두 소품이라 후루룩 읽었다.

신심과 야망

플래너리 오코너는 『현명한 피』나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다. 『기도일기』는 가톨릭 신자인 그녀가 간헐적으로 써내려간 기도일기를 펴낸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소 체념하는 자세로 구하려고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덜 열광적으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열광이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영적 신뢰가 나오는 자세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의 기도일기 A Prayer Journal』(IVP, 2019), 20쪽)

젊은 가톨릭 신자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묵상이자 동시에 기도문이다. 그녀의 기도 안에서 신심과 야망이 충돌하고 있다. 신자로서 자기를 비우고자 하는 깊은 신심과 작가로서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강한 야망, 이 둘 사이의 길항 관계가 팽팽하다.

모든 작가는 기본적으로 ‘관종’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공감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단 작가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자기애를 독려하는 병리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할뿐더러 애초 우리 시대 자체가 바로 “관종의 시대” 아닌가. 로베르트 팔러의 『성인언어』는 지금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애와 과잉자아로 시달리는 이런 세상(공간), 이런 시대(시간)에서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라고 권면하는 것은 상당히 난감한 요구다. 더욱이 오코너처럼 신앙과 영성으로 에고를 극복하라는 요구가 혹자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론 재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인생론을 재고(再考)하는 것이 도움 되리라. 삶에 대한 자세를 돌아보자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문화평론가 이택광 교수의 『인생론』을 다시 읽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사실 인생론에 대한 설법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인생론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생론’이 제시하는 길을 돌아가는 ’반인생론‘은 이렇게 가능하다. 누구도 ’인생‘에 대해 가르쳐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인생론‘을 전복하는 ’반인생론‘의 봉기이다. 남이 가르쳐주는 ’인생‘을 살지 말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론이라기보다 ’새로운 생각‘이다.”(54-55쪽)

이렇듯 반(反)인생론을 전개하는 저변에는 삶에 대한 좌절이 놓여있다. 저자 자신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집단적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차서다.

이로 말미암은 실망과 좌절의 극복을 위한 해법으로 저자는 용기를 내세운다. 용기란, 그에 따르면,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 나아가 체제가 금지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이자 실패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이는 우리가 계속 갈고닦아야 하는 일종의 역량(virtu)이며, 또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유에 대한 요청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용기의 근원을 처세술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찾는다.

이렇듯 이택광의 『인생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다르게 생각하기에 대한 촉구로 끝난다. 혹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꾼다.

일요 철학자

각자 자신의 삶을 철학화하라고 그는 제안한다. 어렵게 들린다. 차라리 그가 (취미 생활로 그림을 그리는 평범한 사람들인) ‘일요 화가’에 빗대어 만든 표현인 ‘일요 철학자’가 더 쉽게 다가올 것 같다. “철학 논문을 쓰진 않지만, 철학책을 일요일마다 읽는 평범한 사람들”(52쪽), 즉 바디우가 말한 ‘철학책을 읽는 노동자“들이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나 역시 마찬가지다.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굳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철학책을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시간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철학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향한 첫걸음일 것이다.”(53-54쪽)

오늘날 문제의 핵심인 에고의 팽창은 실상 레디메이드 자아의 소비에 불과하다. 모두가 남과 다른 나를 말하지만, 실은 남들이 욕망하는 나를 욕망한다. 이는 결국 남과 다를 게 하나 없는 삶이다. 참된 나만의 삶은 남과 다른 나만의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선택이다. 인문교양의 학습은 생각의 씨앗을 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읽어야 한다. 철학 서적도 좋고, 종교 고전도 좋다. 여하간 당장 집어 들어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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