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 3월 27일 일요일

사회는 계급과 계층으로 구성되며, 이는 보통 공간적 층위(상중하)로 규명된다. 이를 가시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영화 <기생충>이다. 이 중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가 보여주는) 중하류층 연구는 차고 넘친다. 반면 (박사장 가족에 해당하는) 상류층 연구는 희소하다. 이는 엘리트 세계가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딴 세상이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는 이 닫힌 세상을 엿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엿보기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셰이머스 라만 칸의 『특권』은 21세기 미국의 신흥 엘리트 재생산 과정에 대한 참여관찰의 생생한 기록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사립고교인 (그리고 국내에는 나경원 의원의 아들이 다녔던 것으로 잘 알려진) 세인트폴 스쿨에서 1년간 교사로 지내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유려한 글쓰기로 담아놓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재밌고,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 진솔하다.

여기에 더해 이론적으로도 탄탄하다. 『특권』은 시종 부르디외의 영향 하에 있다. 상류층을 다루는 최고의 작품은 부르디외의 대표작 『구별짓기』이다. 흙수저인 그가 프랑스 상류층 세계를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학벌 덕분이다. 그는 프랑스 명문 그랑제콜 출신이다. 금수저 동기들이 그에게 자기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허락해줬다. 물론 『특권』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세인트폴 스쿨 출신이자 박사과정에 있는 엘리트이기에 그의 참여관찰 연구가 허락되었다.

그들은 변하고 있다

엘리트의 애티튜드 변화를 저자는 주목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하다라고 하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전통적 엘리트가 일반인들 앞에서 오만하고(특권의식), 특정한 영역(고급문화)을 특권화한 반면, 새로운 엘리트는 (신분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누구 앞에서나 (고급문화든, 대중문화든 상관없이) 어떤 영역에 대해서나 편안하고 무심하게 대한다. 이것은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특권은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엘리트 사회의 구조 변동과 연결된다. 전통적 엘리트는 그들만의 공동체에 대한 동질성이 강하고, 물려받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다. 반면 새로운 엘리트는 자신만의 경험과 노력에 대한 확신이 강하며, 위로 올라가고 성취해야 한다는 열정을 갖고 있다. 전자가 계급의식이 두드러지는 반면, 후자는 능력주의가 팽배하다. 전자는 특권의식(자기 자리 알기)을 갖고 있으며, 후자는 특권(자기 자리 찾기)를 누리고 있다.

하나 엘리트의 애티튜드 변화에 대한 저자의 강조는 다소 과하다. 사실 이런 편안함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가 옥스브리지에서 교수 임용 과정에 개입하는 계급적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교수 임용 면접이 익숙하지 않다면 먹기 불편한 고급 요리를 먹으면서 진행하는 방식을 그는 예로 들었다. 음식을 먹는 과정에 신경이 쓰여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 즉 하류층을 은연중에 걸러내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이 주목한 요소(편안함)에 과하게 매몰되어 이를 새로운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편안함이 새로운 애티튜드로 등장했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는 대상과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가문의 자산을 유지하고자 하는 예전의 부담이 이제는 자신의 업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부담으로 넘어온 것이다. 집안과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해서 애초 독서를 시작할 때에 가진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 물론 엘리트의 변화가 존재한다. 하지만 전통적 엘리트나 새로운 엘리트나 모두 집안이나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 위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더욱이 학생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니 더욱 그렇다. 5장(『베오울프』도 배우고 <죠스>도 배우고)을 읽다 보면, 이게 엘리트 교육기관이 맞나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 형편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의 지배층으로 형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적 맥락에 맞닿는 두 가지 지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학교의 자아 과잉의 독려다. 능력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페미니즘과 뉴에이지 등 현대 사조가 공통되게 보여주는 현상은 자기에의 매몰이다. 학생들이 교육조차 소비자 중심주의로 접근하거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과잉된 자의식이나 무한한 나에 대한 영성적 확신 등은 신자유주의적 구조변동으로 말미암은 글로벌한 현상이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확장의 독려다. 우리 시대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 지젝이 성공한 이유가 무엇인가? MTV 철학자라고 불릴 만큼 대중문화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전반을 망라하는 온갖 이론과 대중문화에서 가져온 여러 소재를 현란하게 뒤섞어 독자를 압도하는 그의 글쓰기야말로 세인트폴 스쿨이 추구하는 인간형의 완성태일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현대적인 현상이다. 이를 엘리트 교육기관이 적극적으로 관철한다는 점을 본서는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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