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9일 월요일

로널드 퍼서의 『마음챙김의 배신』을 읽다. 이 책의 부제를 봐도 핵심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명상은 어떻게 새로운 자본주의 영성이 되었는가?” 이 부제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명상 살인』이 떠오른다.

“쉬운 원리입니다. 당신이 문 앞에 서 있다면, 그저 서 있는 행위에 집중합니다. 당신이 부인과 다툰다면, 오로지 다툼에 몰두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부인과의 언쟁을 떠올리는 데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명상의 원리에 어긋납니다.”(카르스텐 두세, 『명상 살인』, 21-22쪽)

명상과 살인의 우호적 관계

독일의 변호사 출신 작가 카르스텐 두세는 명상을 희화화하는 기발한 블랙 코미디 소설을 썼다(총 3부작으로 출간된 『명상 살인』은 국내에도 두 권이 번역됐다). 주인공 비요른 변호사는 직장과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상을 배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평화를 얻고자 내린 결론은 살인이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살인이다. 이 책은 우리가 갖는 여러 좋은 이미지(평화, 조화, 절제 등)에 부합하지 않기에 웃음을 유발한다. 그 유명한 킬러 고르고 13(사이토 다카오의 동명 만화의 주인공)도 주기적으로 폭포 아래에서 참선을 하지 않던가.

하지만 『명상 살인』에서 보여주는 명상과 효과적 살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불교 파시즘』에 잘 규명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의 이미지와 실제 작동하는 선의 역학은 상충한다. 불교식 명상인 참선이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에 복무하던 것처럼(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전쟁과 선』), 현대의 미국식 명상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첨병(尖兵)이 되었다. 로널드 퍼서는 바로 이 부분에 관심을 집중한다.

명상과 자본주의의 우호적 관계

로널드 퍼서(Ronald Purser)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 재직하는 경영학자인 동시에 불자(佛者)이다. 티벳 불교 종파인 닝마파에서 불교 수련을 시작했고, 한국 불교 종파인 태고종에서 계를 받았다. 『허핑턴 포스트』에 기고한 「맥마인드풀니스를 넘어서Beyond McMindfulness」가 주목을 받아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 비판을 주도했다. 『마음챙김의 배신』은 명상 산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집약적 결과물이다. 원제가 “맥마인드풀니스”(McMindfulness)로서, 치료사이자 불자인 마일즈 닐이 만든 조어이다. 마일즈 닐에 따르면, 그 의미는 “당장은 배를 불리지만 오래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식탐 같은 영적 수행”(17쪽)이다. 하지만 로널드 퍼서는 이 흥미로운 표현을 맥도널드 햄버거의 내용물 비판에 연결시키는 방식보다 맥도널드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비판의 맥락에 갖다 놓는 방식으로 활용한다. 즉 여기서 맥도널드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표상이다.

닐 퍼서가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은 명료하다. 지금의 명상 산업은 명상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으로 만든다. “마음챙김은 개인의 이익과 만족감을 위한 수단으로 시장에서 거래되고 팔린다. 자기-최적화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13쪽) 그러니까 남의 고통(에 대한 자비)보다 나의 평화, 나의 스트레스 경감, 나의 집중력 향상, 나의 생산성 증가 등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나의 에고를 증폭시키는 것이야말로 명상 산업에서 제공하는 우리 시대 명상의 부작용이다. 이게 바로 마음챙김의 개인화이다.

명상 산업의 주요 고객은 기업이다. 기업은 업무 효율을 위해 온 사원들에게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고객의 필요에 부응하여 명상 산업은 업무상 문제의 원인과 해법 모두 개인의 내면에서 찾는다. 착취와 양극화로 대표되는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마음챙김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와 영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원인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배제한 채 개인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려 한다.”(21쪽)

신자유주의 시대의 영성

지금의 상황은 자본주의의 장기지속을 위해 명상 산업이 복무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신자유주의 사고방식에 지배된다. 활용되어야 하고, “효과”가 입증되어야 하며,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22쪽) 그러니까 영성이 자본을 섬기고, 명상 산업이 자본가(지배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명상 산업에 대한 로널드 퍼서의 분석은 자본주의의 강력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다.

명상 산업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으로 갈려 나가는 노동자를 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맞춰가게 순치시키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챙김이 저항의 도구로 제시되지 않고, “자기돌봄”의 기술로 한정되도록 예방할 수 있다.”(22쪽) 명상 산업은 마음챙김하는 노동자들에게 변화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처한 현재 상황(의 지속)을 지지한다. “잔인한 낙관주의”(48쪽)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적용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대상도 노동자와 지배층(엘리트)을 아우르고, 영역도 계속 확산일로에 있다. 본서에서도 기업을 넘어서 학교, 군대, 정치 등 여러 영역을 살펴보고 있다. 명상 상품의 소비는 이제 현대 사회 속에서 널리 존중받는 문화가 되었고, 더 나아가 현대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다.

영성 상품은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여러 기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개인적,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는 윤리에 대한 경시 혹은 무시가 바로 마음챙김 운동의 현실이다. 이는 물론 불교적 명상으로서의 마음챙김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 뉴에이지 등 다양한 종교가 영성 시장의 공급자로 뛰어들었다. 주체만 예속화된 것이 아니라 종교 또한 예속화된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저 이제라도 주요 종교들이 “개인의 변화와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예언적인 힘”(88쪽)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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