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를 읽다. <보보스>는 22년 전, 즉 출간되던 해 여름에 읽었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본 순간 나는 이 책에 반했다. 그 이후로 수도 없이 펼쳐봤다. 책의 숱한 부분에서 나의 사유가 공명하고, 나의 마음이 반응했다. 내 영혼의 책 가운데 하나다.

적에서 친구로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는 미국 보수(공화당) 진영을 대변하는 칼럼니스트다. 미국의 보수적인 칼럼니스트들 가운데 그는 단연 원탑이다. 그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칼럼들도 훌륭하다. 세련된 문장이나 예리한 통찰, 거기에 균형감각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데이비드 브룩스에 대한 나의 처음 입장은 “적이지만 훌륭하다”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냥 친구 같다. 나에게 친구란 무조건 동의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귀를 기울여야 하는 존재다. 어느덧 그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보보스>도 그렇다. 아니, <보보스>야말로 처음부터 그랬다. 물론 나올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고, 이 책에서 제안된 보보스라는 용어는 이미 일상어로 정착됐다. 즉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널리 수용돼 관심에서 밀려났고, 그 결과로 책이 절판됐다. 실은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불편한 진실

“이들 새로운 정보 시대의 엘리트 계급은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이다. 혹은 양쪽 단어의 첫 두 글자를 따서 말하자면, 그들은 ‘보보(Bobo)’들이다.”(10쪽)

알다시피 보보스(Bobos)는 부르주아의 재력과 보헤미안의 감성을 겸비한 신흥 엘리트 계층을 가리킨다. 현대의 엘리트 계층은 혈통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계승된다. 하지만 교육은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 다시 말해 자본으로 분류하는 계급적인 측면이 암시된다.

실제로 <보보스>의 1장, “교육받은 계층의 부상”에서 이 점이 강력하게 부각된다. <뉴욕타임스>의 웨딩섹션에 소개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부모가 전문직종 종사자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성공의 전제가 되는 현실을 본서 초두에서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넘어간다.

“그들[보보스]의 대다수는 상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웨딩 섹션에 나오는 결혼의 84%가 신랑과 신부 모두 부모가 기업체 중역, 대학 교수, 변호사, 혹은 그 밖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이다. 전에는 부모의 돈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부모의 머리가 중요해졌다.”(17쪽)

이게 비단 미국 만의 현실이 아니다. 한국의 인서울 대학의 진학 현황을 보면, 딱히 다르지 않다. 지금은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분명해졌다. 본서를 읽을 때면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를 감추지 않지만, 이에 대해 어떤 부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고상한 자기중심주의

앞서 나는 <보보스>를 내 영혼의 책 가운데 하나라고 언급했다. 이미 말한 대로 “책의 숱한 부분에서 나의 사유가 공명하고, 나의 마음이 반응”한다. 소비(2장), 사업(3장), 지성(4장), 쾌락(5장), 영성(6장), 정치(7장) 등 모든 항목이 다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소비에 의의를 부여한다. 가령 사치품은 곤란해도 필수품이라면 제아무리 비싸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사업가가 되려던 게 아니라 자아 탐구의 여정에서 우연히 사업을 하게 됐다. 욕망에 품격을 입히고, 실용적으로 접근한다. 영성은 복고적인 동시에 자율적이어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저자가 언급한 “고상한 자기중심주의”(148쪽)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자기계발의 본원적 의미에 부합한다. 나 스스로 나를 챙겨야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도래에 걸맞는 강력한 자기애적 흐름이다. 구직의 동기부터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직업을 택할 때는 영적으로 충만하고,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경험적으로 다양하고, 감정적으로 풍요롭고,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끊임없이 도전적인 직업을 선택한다. 이것은 배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당신만큼이나 멋진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창의적이고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조직을 찾아내는 것이다.”(148쪽)

이건 MZ세대가 추구하는 갓생의 단면이 아닌가? 홍보 회사 포터 노벨리의 구인 광고를 봐도 그렇다. “대학, 배움, 성장, 여행, 오르기, 자기 발견.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도처에 ‘나’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이 짧은 글이 온통 ‘나’ 투성이다.”(149쪽) 의미와 성장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다. 자기애 혹은 자기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박고 있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사실 <보보스>가 원래 제시하는 내용은 신흥 엘리트 계급에 대한 해부학이다. 저자 자신은 이를 코믹 사회학으로 소개한다(실제로 <보보스>는 유머감각이 특출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에 와서는 MZ 세대에 대한 해부학이 되고 말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래 문화라는 것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마련이니까. 저자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어찌 되었건, 이 새로운 기득권 계층은 한동안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지배할 것이다.”(11쪽)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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