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사 졸탄 / 『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 옐로브릭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독특하게 불경한 책을 방금 막 읽었다. 바네사 졸틴의 <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이다. 원제는 <제인 에어와 함께 기도하기: 거룩한 실천으로서의 독서에 대한 성찰>이다. 국역본의 부제가 “충분히 깊게 읽는 경이로운 경험에 대하여”인데, -어디까지나 내가 보기에- 저자는 과도하게 혹은 경박스럽게 깊이 읽는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하고 있다.

어느 무신론자의 경건한 독서

과도하게라 함은 그 텍스트가 담지하는 그 이상의 신성함을 끄집어내는 것에 있고, 경박스럽게라 함은 저자 자신이 그 텍스트에 신성함을 집어넣은 것에 있다. “만약 그것을 신성하게 대한다면, <제인 에어>는 신성해질 수 있다.”(22쪽) 이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이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자.

저자는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하버드 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되기 위한 대학원 과정(M.Div, 목회학 석사)을 공부했다. 그리고 여기서 배운 성경 해석법을 세속 문학에 활용했다. 문학을 거룩한 읽기의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이를 설교라고 지칭한다. 목사들이 설교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성경 해석을 신자들과 공유하듯이 그녀는 세속의 일반 독자들과 자신의 문학 해석을 공유한다. 심지어 –본서 이전에- 팟캐스트로 널리 나누고 있다.

경건한 독법과 불경한 독서의 조우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추천사에서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등대로>를 읽으면서, 내가 단순히 문학 순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영적 순례를 떠난 것임을 깨달았다.”(17쪽) 문학 순례가 곧 영적 순례일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 문학을 묵상하고 경건한 교훈을 도출해서 책으로 펴낸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스테파니 울지 엮음, <제인 오스틴 묵상> 홍성사). 문제는 저자가 자신의 에고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에 활용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자신의 내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나는 공격적인 여자, 골칫덩어리, 못된 여자라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공격하고 못되게 구는 것을 정말로 즐기는 것인지 자문할 때가 있다. 내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가 단순히 재미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공격]은 반드시 필요하고 게다가 얼마간은 매력적인 행동이다.”(223쪽)

이렇듯 공격의 동기가 재미라고 인정할뿐더러 성찰 능력도 떨어진다. 먼저 연락도 하지 않고, 북캘리포니아에 사는 친구 집에 다짜고짜 재워달라고 조르는데, 그 친구가 남자친구와의 선약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을뿐더러 그 친구를 나쁜 사람으로 몰고, 친구의 선택이 관계를 끝장냈다고 우긴다(62쪽). “그날 밤 연애 때문에 나를 등진 친구”(71쪽)라고 우기는데, 선약을 깨고 자기를 재워줘야 좋은 친구라는 말인가? 더욱이 그녀는 뒤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잠시 동안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필요 때문에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을 참아줄 수 없다. […] 나는 내 앞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나 자신에게도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223쪽)

정작 자신은 자기 친구에게, 친구라면 마땅하게 설혹 남친과의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이를 취소하고 자기의 숙박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전제를 강요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런 모순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은연 중에 이를 느끼는 탓에 굳이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해명하고 싶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고를 방어하는 독법

당연히 사람들이 볼 때, 그녀에게 무언가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책을 읽는 가운데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다. “참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나더러 화가 났다거나 미쳤다거나 격분했다고 말할 때 정작 나는 그런 느낌이 없다는 점이다.”(224쪽) 남들이 자주 그렇게 말한다면,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자기 안에 느낌이 없다면, 심각하게 느껴야 한다. 더욱이 바로 앞 페이지에서처럼 공격의 동기가 재미라고 한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불경한 독법은 읽기는 이를 방어하는 데에 오용된다.

불경한 독법이라 함은 제인 에어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제인 에어의 작품을 경전으로 취급해서다. 제인 에어의 작품을 묵상의 매개로 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복음주의자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대상으로 삼아 묵상한 결과를 책으로 펴낸 적도 있다. 결국 차이는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독서의 주체에 있다. 그녀의 에고가 책의 도처에서 파닥인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런 식의 독법으로 에고를 강화하는 데에 활용한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원래 묵상이나 거룩한 독서는 자아를 성찰하고, 겸손을 도모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자신의 에고를 자랑하고 변명하는 것은 정치인의 자서전에서나 볼 법하다. 한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건한 독서법을 활용하다니 불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시도한 방식 자체는 무용하지 않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도 있다. 나 자신은 애초에 종교 경전과 고전을 통해 영성을 함양하고자 하기에 굳이 이렇게 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종교 경전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다른 독자들이라면, 근현대의 문학작품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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