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5년 만에 두 번째 장편영화로 돌아온 임성운 감독

시네필 영화감독 임성운의 복수와 일상에 관한 통찰
팬데믹 상황에 제작된 영화... 현장에 우여곡절 많아
심연을 마주한 남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 그려
인간은 부족한 존재라는 동질감, 동정심으로 이어져
재미가 전부인 콘텐츠 홍수 속 성찰의 시간 필요해

지난 4일 투데이신문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지난 4일 투데이신문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주영 기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인 범인이 공소시효 만료 후 눈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복수해야 할까, 아니면 아픈 과거에 목매느라 현재를 인질 삼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아들을 뺑소니 사고로 잃고 남원으로 전출된 형사 ‘이재(허준석 분)’는 미혼모 보험설계사 ‘소현(남보라 분)’을 만나 새 출발 하려한다. 어느 날 그 앞에 아들을 죽인 범인 ‘학촌(이영석 분)’이 나타나며 이재의 삶은 급속도로 혼돈에 빠져든다.

투데이신문은 양자택일의 궁경(窮境)에 빠진 한 남자를 다룬 영화 <찬란한 나의 복수>를 만든 임성운 감독을 만났다. 대한민국에 영화 붐이 일었던 80년대,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는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영화 이야기가 나올 때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열렬히 늘어놓았다. 영화를 향한 시네필(cinéphile)의 애정은 청년의 불타는 순수함과 같다는 듯 그는 나이로도 감출 수 없는 열정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용서와 일상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선뜻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찬란한 나의 복수>의 주제 의식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그의 견해에서 여러 영화와 경험을 섭렵해 얻은 관록이 물씬 느껴졌다.

복수와 미래에 관한 딜레마를 제시하는 영화 <찬란한 나의 복수>의 임성운 감독을 만나 신작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영화와 함께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복수에 대한 새로운 시선

Q. 시나리오까지 쓰셨는데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구상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2008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제 첫 영화 <달려라 자전거>가 개봉을 했어요. 영화감독들이 처음 관객에게 영화를 선보일 때는 굉장히 떨리는데, 그 순간이 지나면 허탈해져요. 그런 마음으로 전주에서 순대국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비가 내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생의 한가운데 점점 빠져들고 있다’고 느꼈어요. 이후에 마흔이 되니까 삶의 반환점을 돌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꿈도 야망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별로 한 게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생각이 유독 아프게 다가왔죠. 그 감상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Q. 무려 15년이 걸린 작품이네요. 고민 끝에 나온 작품인 <찬란한 나의 복수>에 대해서 소개해 주신다면.

어느 날 큰 불행을 겪은 뒤 긴 시간 방황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 남자가 방황에서 벗어나면 이전에는 지루하고 평범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을 되찾고 싶겠죠. 하지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행한 시간 속에 파묻히게 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 우울,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맞닥트리게 됩니다. 그 감정들은 남자를 압도해서 더 이상 다른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저는 그 모습이 마치 심연에서 괴물을 마주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찬란한 나의 복수>는 그 남자가 괴물에게서 벗어나 일상을 되찾는 내용이라고 보시면 돼요.

Q. 기존의 복수극은 피해자가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과 잔혹한 실행만을 조명하는데, 감독님은 그런 복수극과는 다른 길을 택했어요.

처음에는 복수하는 내용으로 구상했어요. 복수는 간단 명쾌하잖아요. 보는 사람이 통쾌하기도 하고. 근데 복수가 성공해도 주인공이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어요. 아무리 봐도 답은 용서밖에 없는데, 영화의 결말을 용서로 끝내려니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용서에 대한 사례를 조사해 보니 용서 자체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다양한 형태의 용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용서가 정답이라고 말해도 안 되고,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인정해야 하고... 그래서 ‘용서’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영화에서 한 번도 안 나오고, 홍보할 때도 가급적 쓰지 않도록 했습니다. 관객들이 그걸 찾아주길 바랐거든요. 그래야 감독이 주입한 용서가 아니라 각자가 정의한 용서가 생기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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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찬란한 나의 복수> 포스터. [사진제공=씨네소파]

Q. 제목에 ‘찬란’과 ‘복수’라는 모순되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영화의 주제의식과 관련돼 보입니다.

영화의 주제는 ‘용서를 해야 비로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예요. 복수는 과거 일에 대한 응징이잖아요. 복수하려는 사람은 평생 과거에 얽매여 사느라 나아갈 수 없어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죠.

인간은 모두 천재적인 면이 하나 있어요. 바로 자기 합리화예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건 지금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기합리화를 하잖아요. 그걸 뒤집어보면, 뭐든 선택해도 된다는 거예요. 대신 선택이라는 건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를 버리는 일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가 일상이고요.

그래서 일상은 과거에 내렸던 나의 선택들의 총합이에요. 그렇기에 모두의 일상은 존중받아야 해요. 지겹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아름다운 겁니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복수가 가장 찬란한 복수고요.

피해자가 마침내 용서할 수 있는 이유

Q. 이재의 아들을 죽인 범인 학촌의 결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웃으며 죽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숨겨진 의미가 있다면.

학촌은 이재의 아들이 죽을 때 ‘뭐가 보이냐’고 물어봐요. 그리고 자신도 죽기 전에 같은 질문을 받죠. 그때 학촌은 떨어지는 물, 빈 의자 세 개, 고여있는 물을 차례로 본 뒤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걸 깨닫고 죽습니다. 빈 의자 세 개는 각각 학촌 자신과 아내, 아들 이렇게 세 사람을 의미해요. 학촌 삶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들이죠. 물은 생명의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잖아요. 이재가 영화 말미에 물이 가득한 속초 바다를 새 보금자리로 택했듯, 학촌도 이재의 선택으로 인해 용서를 받고 새 삶을 부여받은 거죠. 그걸 스스로 깨달았을 때 웃어요. 누군가 나쁜 놈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냐고 물어보면, 저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인종 격리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죽임당했어요. 그걸 해결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설립됐죠. 당시 위원장을 맡았던 노벨평화상 수상자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가 이후에 발간한 책을 살펴보면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경지의 사례들이 많아요. 굉장히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화해를 시키는데, 피해자가 엉엉 울면서 화해하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죠.

용서는 동정심으로부터 나온다고 해요. 피해자가 가해자를 마주하면 강력한 살의를 느끼는데, 그 순간 ‘나도 살인자가 될 수 있구나. 나도 똑같이 모자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대요.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이상한 동질감이 동정심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제야 피해자들은 용서의 길로 접어들 수 있어요.

영화에 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하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영화에 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하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Q. 학촌 캐릭터가 주인공 이재만큼 중요하다고 봐요. 이재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도 하고,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마주하는 심연이라는 개념을 상징하기도 하면서, 학촌 스스로도 굉장히 입체적인 서사를 가진 인간으로 나와요. 해당 캐릭터를 구상할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영화 속 대표적인 악인 캐릭터를 떠올리면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등이 있죠. 비범한 분위기를 가진 이들과 달리 학촌은 악이 돌돌 말려서 마침내 평범해진 사람이에요. 극 중에서 과거에 조폭이었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조폭도 사실 70대가 되면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평범해지는 길을 택하거든요. 아우슈비츠에서 잔혹하게 사람을 죽인 자들도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평범한 엄마 아빠였잖아요. 원래 나쁜 건 평범함 속에 있으니까 그런 사람으로 그리려고 했죠.

Q. 허준석(이재 역), 이영석(학촌 역), 남보라(소현 역) 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이재의 키워드는 ‘분노’예요. 이재가 분노 때문에 13년 인생을 낭비했으니까요. 이걸 잘 표현해 줄 배우를 찾다가 <멜로가 체질>에서 주인공에게 열변을 토하는 동료 PD 연기를 하는 허준석 배우를 보게 됐어요. 직접 만나보니 자기 목적에 대한 배고픔이 보였어요. 그래서 이재랑 잘 맞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학촌 역은 아주 까다로워요. 이 사람이 악인이라고 설명해 줄 잔인한 살해 장면이 있다거나,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잔혹한 성격을 묘사한다거나 하는 장치 없이 오로지 대사와 행동으로만 표현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관객이 선입견을 갖지 않는 배우 중에서도 대사만으로 악역을 연기할 수 있는 이영석 배우를 캐스팅하게 됐어요. 극 중 모습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정말 착하신 분입니다.

‘소현’은 고등학생 미혼모로 어릴 때부터 억세게 살아온 인물이에요. 어려 보이지만 사실은 평범한 중년의 사람보다도 인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죠. 그래서 앳되지만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어요. 그때 남보라 배우가 눈에 띈 거죠.

Q. 이재와 소현이 처음 만나는 장소는 남원, 마지막에 함께 떠나는 곳은 속초예요. 지역 선정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예전에 남원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지리산이 굉장히 좋았어요. 또 춘향이 고향이 남원이잖아요. 이재가 일상을 찾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놓을 수는 없으니까 그곳에서 사랑도 일상도 찾길 바랐죠.

질문에 답변하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미소 짓는 임성운 감독. ⓒ투데이신문

Q. 영화에서 이재가 아재 개그를 해요. 썰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의도하신 건가요.

안 그래도 남보라 배우가 저보고 냉동인간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아재(아저씨)스럽다는 거죠. 그런데 그 대사를 넣은 이유가 있어요. 이재는 과거에 매몰돼 있느라 세상과 교류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소현을 만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데 정서적으로 냉동돼 있으니까 재밌는 유머가 나올 수가 없죠.

Q. 코로나19로 제작 현장에 차질이 많았을 것 같아요. 관련 에피소드를 풀어주신다면.

원래 첫 촬영이 이재 집이었어요. 미술감독이 세팅까지 마쳐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빌라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서 단지 전체가 격리됐어요. 영화 배경이 겨울이라 시기를 놓칠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것부터 찍으면서 이재 집을 계속 알아봤죠.

영화에서 소현의 아들이 이재와 소현의 사진을 찍어주는 장소도 원래는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였습니다. 그런데 12월 중순에 눈이 와서 도로가 봉쇄돼 버렸어요. 거기는 한번 눈이 오면 잘 안 녹는 곳이라 3월 말은 돼야 봉쇄가 풀린다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곳을 찾아다녔죠. 이외에도 우여곡절은 참 많았습니다.

X세대 시네필 영화감독이 사랑한 영화

Q. 감독님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금과 달리 80년대에는 영화과 출신 사람들보다 영화동아리 출신 사람들이 많았어요. X세대가 영화 붐이 일었던 딱 그 시대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영화 한다고 하면 두 가지를 물어봤어요. 첫 번째로 ‘너 집안에 돈 있냐’, 두 번째는 ‘여자친구 집안에 돈 있냐’ 였죠. 영화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선택하는 순간 경제적으로 10년은 어렵게 살 각오가 돼있어야 했거든요. 그래도 전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함께 흐름을 탔던 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레오 까락스(Leos Carax)’ 감독의 <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큰 계기가 돼줬습니다.

Q. 그럼 나중에 그런 통통 튀고 에너지 넘치는 영화를 기대해 봐도 될까요.

그건 젊을 때 찍을 수 있는 영화예요. 젊음에 대한 영화기도 하고요. 몇 년 전에 레오 까락스 내한 기념으로 <나쁜 피>를 상영해 줬어요. 그걸 보러 갔는데 관객들이 대부분 20대, 30대 초반이더라고요. 30년 전에 만들어진 옛날 영화를 왜 보러 오나 싶었는데, ‘그렇지 젊은 영화였지’ 싶더라고요. 저는 이제 그런 에너지를 가진 영화는 못 만들 것 같아요.

반면에 나이가 든 사람이 뿜을 수 있는 에너지도 있습니다.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를 좋아하는데, 그 작품이 딱 그래요. 그런 에너지는 내보낼 수 있겠죠.

Q. 마지막으로 <찬란한 나의 복수>를 본 관객들이나 볼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요즘은 누구나 영상물을 만들 수 있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저도 그중 하나고요. 각자가 알지 못하는 삶을 영화를 통해 경험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추세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어요. 재미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가끔은 영화를 통해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고,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를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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