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청년 빈곤 문제 다룬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신작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고뇌 다룬 영화
숨은 메타포 찾아 먹는 재미... “안줏거리로 즐겼으면”

지난 4월 30일 전주 한옥마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형석 감독.&nbsp;ⓒ투데이신문<br>
지난 4월 30일 전주 한옥마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형석 감독.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주영 기자】포근한 햇살이 온 길섶에 닿았던 지난 4월 30일,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정형석 감독을 만나기 위해 전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전날 내린 비로 서늘했던 거리도 어느새 보송보송 말라있었다. 고목으로 천장을 마감한 고즈넉한 카페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 온 빈티지 가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정형석 감독의 희끗한 머리칼은 내면의 풍파로 보통 사람보다 이르게 도달한 회색 같은 인상을 풍겼다.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혜리(전혜연 분)’가 대학로의 한 극단에 신입부원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을 다룬 영화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지만 똑 부러지게 말하는 혜리의 모습에 극단 연출가 ‘해영(박호산 분)’은 호기심을 갖지만 어떤 이들은 경계심을 표한다. 혜리는 그들 사이를 고고히 헤집으며 은밀한 변화를 일으킨다.

정형석 감독은 지난 2020년 2월 전작 <성혜의 나라>로 투데이신문과 처음 만났다. 외면받던 청년 빈곤 문제를 양지로 끌어낸 그의 영화를 보고 많은 관객이 위로를 받았다. 타인을 향한 관심과 자신의 아픈 경험이 한 데 녹아 굳어진 단단한 영감을 은막 위에 굴리는 그는 관성을 따라 오늘날의 전주에 도착했다.

정 감독은 신작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를 통해 예술에 관한 숙의가 이뤄지지 않는 연극계의 세속적 경향을 스크린에 드러냈다. 본인 스스로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그가 느끼는 이 시대의 회색은 어떤 모습일지 함께 이야기를 나눠봤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포토월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lt;페르소나 이상한 여자&gt; 감독과 배우진. [사진제공=전주국제영화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포토월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감독과 배우진. [사진제공=전주국제영화제]

Q. 네 번째 장편영화로 전주에 돌아온 소감이 어떤가요.

2017년에 <여수 밤바다>로 전주에 처음 방문해서 지금까지 장편 4개, 단편 1개로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여러 영화제를 다녀봤지만 개인적으로 전주는 고향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관, 행사장, 맛집, 카페 등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서 하나의 작은 동네라는 인상을 주거든요. 그래서 사람들 만나기도 쉽고 이동하기도 편하죠. 그런 따스함 덕분에 ‘내년에 또 와야지’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Q. 전주가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 본인에게 전주국제영화제는 큰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여수 밤바다>가 생각지도 않게 전주에서 한국경쟁 부문으로 초청됐어요. 첫 영화제다 보니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인식도 없었죠. 그래서 심드렁한 채 전화를 받았는데, 나중에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너무 잘 됐다며 축하해 주는 거예요. 실제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여해 보니 예상보다 스케일도 훨씬 컸고요. 그 일이 동기부여가 많이 됐습니다.

둘째 장편 <성혜의 나라>는 전주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탔고, 셋째 작품 <앙상블>은 배경이 전주예요. 그러다 보니 전주국제영화제는 저의 영화 커리어에서 빼려야 뺄 수 없는 존재죠. 그래서 전주가 고향처럼 느껴지나 봐요.

Q. 연극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어요. 같은 이야기라도 연극으로 올릴 때와 영화로 제작할 때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독립영화는 연극과 비슷합니다. 창작자의 의도가 더 존중받고 그만큼 많이 드러나요. 그래서 다룰 수 있는 주제라든지 인물 중심으로 깊게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 유사하죠.

하지만 연극은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사건이 실시간 진행돼요. 연출가라 하더라도 막이 올라가면 배우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고도 하죠.

영화는 시작부터 마침표까지 감독이 개입해서 결과물을 통제할 수 있어요. 거기서 오는 표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연극으로 올려 현장성을 부각했을 때 관객에게 잘 전달되는 이야기가 있고, 감독이 끝까지 통제했을 때 훨씬 효과적인 이야기가 있는 거죠.

이외에도 연극은 소수의 관객만 만날 수 있지만 영화는 극장, OTT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차이점도 있겠네요.

지난 4월 29일 전주에서 진행된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GV 시간에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정형석 감독. [사진제공=전주국제영화제]

Q. 처음 공연계에서 시작한 배우 커리어를 영화계로 확장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동시에 대학로에서 극단을 운영하면서 영화 연출도 꾸준히 하시고요. 이렇게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제가 ‘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습니다. 20대를 배우 생활로 지내다 보니 더 늦기 전에 예전부터 꿈꿨던 영화 연출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30대부터 입봉 준비를 시작했는데 점차 지지부진해지고 벌린 사업은 잘 안되니 낭떠러지에 몰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때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바닥을 쳤는데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열심히 해야겠구나,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중하구나 하고 깨달았죠. 이후부터는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휴지기 없이 일하기에 상업영화는 단계도 복잡하고 제작비도 조달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어요. 반면 연극이나 독립영화는 창작자 의지만 있으면 만들 수 있거든요. 그래서 독립영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예산이라 힘든 점이 많습니다.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를 찍을 때도 스태프를 최대한 줄였어요. 조명 없이, 미술 없이, 촬영 감독은 한 명만 있게끔... 이번에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죠.

배우를 계속하는 이유는 저에게 유일한 수입원이기 때문이에요. 주변에서 우스갯소리로 ‘연출하면서 왜 배우들 밥그릇까지 뺏어가냐’라고 말해요. 근데 제가 연기해서 번 돈으로 연극도 만들고 제 작품에 참여한 배우들 출연료도 주거든요. 그래서 남들 보기에 일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Q.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를 소개해 주신다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고뇌에 관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예술가는 주인공이자 극단 연출가인 해영이에요. 그가 여러 가지 모호한 상황에 처하면서 딜레마를 겪거든요. 하지만 영화 속에 굉장히 많은 메타포를 숨겨 놨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어요. 저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안줏거리 삼아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Q.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라는 제목답게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야기도 평범하게 흘러가지는 않아요. 기획 아이디어는 어디서 출발했는지 궁금합니다.

예술을 한다고 모인 사람들이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큰 고민 없이 시시껄렁한 얘기만 나누는 현실에 해영은 불만을 가져요. 영화 속 시시한 대화들은 실제 연극 바닥에서 매번 나오는 이야기예요. 그런 세속적인 모습에 신물이 난 제 마음을 해영에게 투영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비단 연극계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가들이 자부심을 지니고 토론하지 않고, 사회의 부정의는 외면하면서 밥그릇 싸움에 치중하는 상황이 제가 언급한 부조리입니다. 그러한 부조리에 대항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있는 해영 역시 비겁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에게 혜리가 일침을 놓아요. 혜리는 예술을 처음 시작할 때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재미가 있어서 예술을 시작했던 해영의 첫 모습인 거죠.

지난 4월 29일 전주에서 진행된 &lt;페르소나 이상한 여자&gt; GV 시간에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정형석 감독(우측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전주국제영화제]
지난 4월 29일 전주에서 진행된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GV 시간에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정형석 감독(우측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전주국제영화제]

Q. 지난 4월 29일 전주에서 진행된 GV에서 영화의 반전을 들은 객석이 술렁거렸어요. 첫 상영이었는데 관객 반응은 예상했나요.

나름 복선을 깔아놨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너무 쉽게 알려주면 재미가 없고 너무 모르면 안 되니까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게 어려워요.

그날 어떤 관객이 저랑 박호산(해영 역) 배우, 음악감독 모그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이냐고 질문했어요. 그에 대해 모그가 “예술은 표현과 설득이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모그와 얘기해 본 적 없었는데 그 대답을 들으니 신선했어요.

그날 관객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처럼 예술의 의미나 영화의 반전을 소재 삼아 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 영화가 안줏거리처럼 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Q. 전작 <성혜의 나라>에 이어 이번 작품도 흑백으로 찍은 의도가 있다면.

‘성혜(송지인 분)’의 삶은 단조롭고 팍팍해요. 그래서 컬러보다는 단조로운 느낌이 강한 흑백을 사용했습니다. 이번 작품은 진실과 거짓, 너와 나, 실재와 판타지같이 이원화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대비 효과가 강한 흑백으로 제작했어요. 또한 사실적인 컬러보다는 흑백이 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이번 작품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둘 중에 무엇으로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해외에 배급할 때나 OTT에 서비스할 때 흑백은 현학적인 첫인상 때문에 잘 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처음에 컬러를 주장했던 사람도 흑백판을 보고서는 수긍했어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에서 풍기는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되는 몽환적인 느낌이 흑백과 잘 맞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스틸컷. [사진제공=네이버영화]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스틸컷. [사진제공=네이버영화]

Q. 본인 작품에 배역을 직접 맡으시는 경우가 많아요. <여수 밤바다>에서는 주인공 지석 역을, 이번 작품에서는 박 원장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본인 작품에 등장한 자신을 본 소감이 어떤가요.

제가 연출한 작품에 직접 출연하면 집중력이 떨어져요. ‘액션’을 외치는 역할이야 조감독한테 주면 되지만, 감정 잡고 연기하다가 마지막 ‘컷’은 제가 외쳐야 하니까요. 그리고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해요. 이번 작품에서 박 원장 역 배우도 원래는 따로 있는데 사정상 공석이 됐어요. 그런데 박호산 배우가 저한테 저를 추천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죠.

<여수 밤바다>의 지석은 사실 제 자신이어서 굳이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인물이 가진 뉘앙스를 저보다 잘 표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의 해영도 저를 투영해서 만든 인물이지만, 극 중에서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고 이미지가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박호산 배우에게 잘 어울린다고 판단해 제가 하지 않았던 겁니다.

Q. 컷 전환을 자제한 롱테이크(long take·숏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에 풀샷(full shot·카메라로 대상의 전체 모습이 나오도록 찍는 일)과 패닝(panning·카메라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수평으로 회전시키는 일)으로 촬영한 분량이 많아요. 그렇게 촬영한 이유가 있나요.

상업영화는 컷 전환이 많아요. 그렇게 찍으면 배우도 연기하기 수월하고 촬영할 때도 쉽죠. 하지만 독립영화는 저예산이다 보니 촬영 회차가 적습니다. 롱테이크는 일종의 리스크인 셈이죠.

그런데도 제가 롱테이크를 선택한 이유는 진정성이 중요한 대화가 자주 등장하는 만큼 인위적이지 않고 리얼하게 보였으면 했기 때문이에요. 인물이 대화할 때 마치 관객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싶었어요. 저는 연극 연출과 배우를 겸하는 영화감독으로서 배우를 보는 눈이 있어요. 이 장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컷 전환이 많은 상업영화는 유튜브 영상처럼 대사 사이에 뜨는 시간을 편집해서 자를 수 있어요. 호흡을 잘못 살리면 영화가 늘어지고 관객이 지루해하기 때문에 공백을 자르고 대사를 연결해서 감독이 원하는 속도와 흐름으로 조절하는 겁니다.

대사 사이에 시간이 어색하게 뜨는 문제를 연극에서는 ‘마가 뜬다’고 표현해요. 그런데 롱테이크는 마가 뜨는 순간을 편집 단계에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온전히 해내야 하죠. 그런데 저는 배우를 적재적소에 캐스팅할 수 있고, 그들의 연기를 정확히 디렉팅 할 수 있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어요. 결정적으로 배우들이 저를 잘 따라줬기 때문에 그런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지난 4월 30일 전주 한옥마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형석 감독.&nbsp;ⓒ투데이신문<br>
지난 4월 30일 전주 한옥마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형석 감독. ⓒ투데이신문

Q. 차기작 계획을 여쭙고 싶어요.

앞으로 목표는 1년에 영화 한 편씩 꾸준히 만들어서 매년 전주에 오는 거예요. 그다음 목표는 칸이나 베를린 영화제에 가는 겁니다. 차기작으로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될 난민이나 이민자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고 싶어요. 이미 2022년에 <선산>이라는 단편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적 있으니 수월하지 않을까 싶네요.

Q.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가 올가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이 영화를 만날 관객들이 어떻게 관람하면 좋을까요.

연극의 4요소에 관객이 들어간다고 말해요. 영화도 마찬가지로 관객이 봄으로써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관객의 태도가 중요해요.

우리가 식사를 할 때 어떤 음식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면서 먹고, 어떤 음식은 음미하면서 먹잖아요. 전자와 비슷한 상업영화는 부담 없이 즐기면 되고, 후자와 비슷한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는 음미한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목의 의미나 감독의 의도를 추측해 보고, 영화를 본 감상을 서로 나누다 보면 이 영화의 맛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 영화는 찾아볼수록 뽑아낼 게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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