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 칸카 프리차씨의 이야기

태국 출신…1999년 이주노동자로 한국 생활 시작
공장 노동·보부상하다 현재 19년째 마트·식당 운영
월급 35만원 받기도…재정 탓 일급만 받은 적 빈번
아내·자녀 셋과 함께 거주하며 지난해 영주권 취득
모금 등 주도하며 외국인 도와…센터 설립이 목표

‘이주민’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사람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옮겨와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이주민은 지난 2021년 12월 기준으로 약 213만 명이다. 현재 외국인 인구가 총인구의 5%를 넘기면 ‘다문화 사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이미 지난 2019년 국내 인구의 4%를 넘어섰다.

이처럼 이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닌 전국 곳곳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웃’이 됐다. 많은 이주민들 중 다문화가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다. 

<투데이신문>은 연재 기획 [내 이웃, 이주민]을 통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이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물론 삶의 숨겨진 그늘을 직접 들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더욱 우리나라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제언들을 담았다.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는 프리차씨.ⓒ투데이신문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는 프리차씨.ⓒ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크고 무거운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과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가득한 마을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한 작은 마트가 있다. 바로 태국 출신 프리차(52)씨가 19년째 운영 중인 ‘농서울마트’다. 

지난 1997년 4월 그는 먼저 한국에 살고 있는 지인의 추천으로 여행차 한국을 첫 방문했다. 고향과 달리 선선한 바람이 그의 코를 간지럽혔고, 깔끔한 도시가 마음에 쏙 들었다. 

기분 좋은 첫인상과 함께 시작한 여행은 프리차씨를 만족시켰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점차 마음이 열려갔다.

그러던 도중 지인의 추천으로 일자리를 소개받게 됐다. 그는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한국에서의 추억이 마치 선물과도 같아, 이곳에서 일해봐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프리차씨의 긴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생각만큼 한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외환 위기를 막 벗어난 한국의 상황 탓에 여러 공장을 전전해야 했고, 적은 월급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이에 그는 생계에 더 도움 되고자 주말마다 태국 음식, 물품 등을 가득 싸들고 거리로 나섰다. 오랜만에 보는 모국 음식에 노동자들은 기뻐했고, 이는 곧 구매로 이어졌다. 

그렇게 그는 자영업에 뛰어들었고, 지금까지 달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일궈냈다.

낯선 타지에서의 삶은 불안정하고, 위기에 여러 차례 직면하기도 했지만 그는 굳세게 자신을, 그리고 가족을 지켜나갔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노동자를 넘어 한 가족의 가장으로 뿌리내렸고, 누군가에는 다정다감한 사장님으로, 도움을 주는 귀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프리차씨가 과거 아내와 길거리에서 노동자들 위한 물품을 파는 모습. [사진제공=본인]
프리차씨가 과거 아내와 길거리에서 노동자들 위한 물품을 파는 모습. [사진제공=본인]

노동자로 시작한 한국살이

태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그에게 여행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고향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한국의 문화가 새로웠던 것은 물론 가업인 농사만 할 수 있었던 고향과 달리 다양한 직업들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 우물에 갇혀 있다가 더 큰 세상으로 나오는 듯했던 프리차씨는 자연스럽게 한국에서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내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1999년에 만난 첫 직장은 대구에 위치한 한 납골당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석재를 만들고 다루는 일을 맡았다. 프리차씨는 큰 절단기로 돌을 자르고, 지게차로 무거운 돌을 옮기는 등의 고된 일을 도맡아 했다.

온몸이 상처, 멍으로 채워져 갔고 뭉친 근육과 뻐근한 몸을 푸는 것이 일상이 돼갔다. 하지만 힘들고 퍽퍽한 삶 속에서도 그는 웃을 수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농사를 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직장에서 만난 한 여자, 즉 현재 아내 때문이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아내는 이혼 경험이 있어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도 성실하고 밝았는데, 프리차씨는 그 모습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어느새 사랑에 빠졌고 둘째 아이까지 임신하는 축복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과 함께 곧 세상에 나올 아이를 돌보며 결혼식까지 준비하기에 상황이 녹록지 않아 두 사람은 진실한 사랑 앞에 잠시 결혼식을 미루기로 했다.

아내와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자, 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당시 석재 회사에서 받았던 월급은 단돈 35만원. 이마저도 1년 동안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 월급도 제 때 받지 못해 일급으로 식사 값만 받으며 생활해야만 했다.

한 가정을 책임지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임을 느낀 프리차씨는 거리로 나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태국 음식, 물품 등을 판매하기로 했다. 근처 공장이 많아 노동자들의 수요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더욱이 가게 차릴 형편이 되지 않아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평일은 석재 일을 하며, 주말에는 거리로 나서 물건을 팔며 돈을 벌었다. 특유의 넉살로 노동자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자, 하나둘 손님들이 늘어갔고 프리차씨의 주머니 사정도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힘든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과 많은 사람들 속 혼자라는 외로움이 그를 찾아와 괴롭힐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중하고 보호해야 할 가족을 떠올리며 감내하고 이겨냈다.

“납골당에서 일할 때 추운 겨울이 가장 힘들었어요. 거센 추위는 물론 돌이 얼거나 얼음이 생겨 잘라내도 계속 붙는 바람에 일을 두 번씩 해야 했고, 주말에는 추운 밖에서 하루 종일 서서 떨었죠. 하지만, 회사에서 돈을 제 때 주지 않던 적이 많다 보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어요. 나중에는 매 주말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오히려 공장보다 보부상 일이 더 수익이 좋게 됐죠.”

프리차씨와 가족들이 현재 거주 중인 자택. 1층에는 마트가, 지하 1층에는 식당이 운영 중이다. ⓒ투데이신문
프리차씨와 가족들이 현재 거주 중인 자택. 1층에는 마트가, 지하 1층에는 식당이 운영 중이다. ⓒ투데이신문

정착이라는 목표

열심히 일하던 프리차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다니던 석재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1년 동안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는데, 당장 일자리부터 잃게 돼버렸다.

낙담에 빠져 있던 그에게 다행히 구원의 손길이 떨어졌다. 부평에서 거주 중인 ‘지인이 이곳에 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전한 희소식이었다. 그는 그 길로 부평으로 거주처를 옮겼다. 

하지만 부평에서의 생활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고 취업을 한다 해도 회사 재정이 좋지 않아 단기로만 일해야 하는 현실과 마주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자마자, 그는 플라스틱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했고, 낯선 곳에 또 한 번 적응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찼지만, 그를 더 슬프게 했던 것은 구슬땀을 흘린 지 채 1년도 안돼 사직을 통보하는 회사였다. 이후 그는 길면 1년, 짧으면 6개월 공장을 전전하며 적응과 퇴사의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다.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쓰린 현실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해낼 수 있다고 애써 웃으며 안심시켜 줬지만, 사실 이는 자신을 위로하는 주문과도 다름없었다.

계속되는 퇴사와 이직에 지친 그는 결국 자신이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가족에게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 싫었던 그다. 그러다 문득 거리에서 물건을 팔던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다. 힘들었지만, 자신과 가장 잘 맞게 느껴지던 일이 장사였다. 

결심한 뒤로부터 그는 시청과 외국인지원센터를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자문을 구하는 등 창업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던 지난 2004년 드디어 김포의 공장이 모여있는 동네에 작은 마트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그는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과 태국 음식은 물론 쉽게 구할 수 없는 태국의 향신료, 간식거리, 생활용품까지 판매했다. 금세 입 소문을 탄 마트는 점점 손님들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제야 프리차씨는 양 어깨에 무겁게 지니고 있던 책임감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점차 돈이 모이고, 가정에 평안이 찾아오자, 그는 마트를 열기까지 항상 자신의 옆에서 큰 힘이 돼 준 아내와 2006년 드디어 웨딩마치를 울릴 수 있었고, 2년 뒤인 2008년에는 셋째 아이까지 품에 안는 축복을 누렸다. 

“마트를 처음 운영할 때 제가 언어의 장벽도 있고, 고향 집이 잘 살던 편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몸을 많이 움직였죠. 직접 태국에 가서 음식, 물품 등을 구해오는 걸로 시작해서 점차 수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갔어요. 그리고 김포에는 공장이 많고 그곳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모국 음식을 먹고 싶겠어요. 누구보다 공감하니까 마트를 꼭 하고 싶었죠.”

농서울마트 내부. 모금을 위해 마련된 돈으로 꾸며진 나무가 가운데 위치해 있다. ⓒ투데이신문
농서울마트 내부. 모금을 위해 마련된 돈으로 꾸며진 나무가 가운데 위치해 있다. ⓒ투데이신문

한 지붕 다섯 가족

가족이 힘을 합쳐 열심히 일궈낸 마트는 동네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어쩔 때는 외국인 손님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손님들이 더 많이 찾아올 정도였다.

손님들은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은 기본이고, 프리차씨를 만나러 와 오늘의 고충,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들에게 마트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타지에서 외롭고 힘든 사람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 같은 존재였다.

점차 많은 손님이 마트를 찾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나둘씩 듣고 나니, 프리차씨는 욕심이 생겼다.

보다 다양한 물건을 다루며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고, 그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고향 음식을 먹는다면 조금이나마 그리움이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또한 집과 거리가 먼 마트로 인해 아침마다 가족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던 상황이 마음이 쓰였다. 더욱이 둘째 딸의 대학교가 집과 거리가 멀어 따로 떨어져 살았는데, 그는 항상 딸이 걱정됐다. 이에 좀 더 큰 곳으로 가게를 옮기고 더 넓은 집까지 마련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리차씨는 낯설고도 어려운 이 땅에서 가족의 삶의 뿌리를 내릴 공간을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미숙한 한국어 실력에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거나 어려운 서류 업무에 버거운 내 집마련이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밤낮없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동안 벌어뒀던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결과, 김포의 한 작은 동네에 가게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건물 지하에는 아들이 운영하는 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1층에는 마트를, 그 위 두 층에는 다섯 가족이 오순도순 지낼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마련했다. 한국에 와서 대구, 부평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안정하고 위태롭기만 하던 삶이 비로소 정착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궈낸 진정한 집, 그리고 이로 인해 행복한 미소를 짓는 가족들을 보고 나서야 프리차씨는 어깨에 가득 올려두었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외국인인 제가 직접 부동산을 찾아다니고 계약을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가족들과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어요. 저랑 아내는 한국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고 일해서 힘든 적이 많았어요. 최소한 저희 아이들이 그런 일들을 겪지 않게 하려고 더 열심히 돈을 벌었던 거 같아요. 가족은 삶의 원동력 그 자체죠.”

그는 가족을 위해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갔다. 그리고 그의 애정은 마트 이름 ‘농서울마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농’은 태국어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의미한다. ‘서울’은 둘째 딸 칸카 샤 라본씨의 별명이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도시이자 큰 도시였기에 그가 상징적으로 딸에게 붙여줬다.

‘농서울 마트’는 최근 더 큰 곳으로 이사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전보다 30%밖에 안 되는 손님을 받고 있다. 손님은 줄었지만, 항상 그는 그 자리에서 언제든 찾아올 손님을 반길 준비를 하며 우직하게 마트를 지키고 있다. 

프리차씨가 농서울마트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프리차씨가 농서울마트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멈추지 않을 김포 ‘프반장’의 삶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바쁜 그였지만, 오랜 시간 장사를 하며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자주 만나다 보니 그들의 향한 공감도, 연민도 커져갔다.

막 한국에 온 외국인을 바라볼 때면, 자신도 겪어왔기에 너무나도 잘 아는 힘듦과 외로움, 그럼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혼자 매서운 세상을 맞서왔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에 프리차씨는 이들을 위해서 두 손 두 팔을 걷기로 했다. 누가 시키지도, 이득이 오는 행위도 아니었지만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했다.

먼저 아직은 한국말이 서툰 그들을 위해 통역을 해주고, 각종 서류 처리를 도와줬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약했던 점은 의료 부분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다치는 일도 많은 노동자들을 위해 이들의 입과 귀가 돼줬다. 그러다 보니 그를 찾는 노동자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는 동네 곳곳을 뛰어다니며 이들을 보호하고 이끌었다.

가끔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나 하면 인근 이주민센터와 협력을 통해 모금을 진행해 크게 다친 노동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병원 입·퇴원 과정을 도왔다. 노동자 본인 혹은 주변 가족이 사망했을 경우, 경황이 없는 이들을 대신해 장례 절차를 도맡아 처리해 주고 유골함, 유품 등을 모국에 있는 가족들의 품에 돌려보내주는 일도 책임졌다. 

“몇 년 전 새벽에 갑자기 한 여성 노동자가 심한 복통을 앓은 적이 있었어요. 당시 10~15분 이내에 병원을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때 직접 그를 안아 차에 싣고 운전해서 병원을 갔습니다. 가서도 보살피고 치료과정을 도와줬죠. 알고 보니 아기를 자궁 외 임신한 것 때문에 그랬던 거였어요. 그땐 너무 놀랐지만, 지금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자녀와 함께 지내는 걸 보니 뿌듯해요.”

그렇게 그는 이주민들에게 김포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프반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언뜻 그는 한국에 완벽히 적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대한민국 국민의 영주권을 받은 것은 한국에 온 지 25년 만인 지난 2022년이다. 우리나라의 영주권 취득 과정이 까다로워 여태 1년마다 D-8비자(외국인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발급받는 비자)를 갱신하면서 지내오다가, 지난해 매출액, 영주용 종합평가 등 조건을 다 채워 영주권을 취득하게 됐다.

프리차는 영주권을 취득하게 된 그날,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오래 간직해 온 꿈을 이뤘다는 벅참과 함께 진정한 한국의 주민으로 인정받는 듯한 느낌이 강렬했다. 

이주민이라는 존재에게 너무나도 가혹하고 척박한 땅에서 그는 홀로 거센 비바람에 맞서며 씨를 심고, 물과 거름을 주며 인생의 나무를 키워냈다. 잘 자라나지 못할 것 같던 나무는 어느새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려 누구보다 웅장하고 튼튼하게 성장했다.

그는 나무처럼 올곧고 단단한 삶과 신념으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들을 지켜내기 위해 가지를 뻗고 잎을 피워내 그만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한창이다.

“한국에 온 뒤 저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아무래도 한국에서 올해 안정적으로 있고 싶으니까 영주권을 얻는 것이 가장 첫 목표였고 두 번째는 제 소유의 건물을 짓는 게 목표였죠. 그런데 지금 다 이뤘어요. 그런데 미래 목표를 또 정하라고 하면, 이주민을 위한 센터를 운영해서 태국인분들을 넘어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분들을 돕고 싶어요. 제가 마트로 버는 돈을 저와 같았던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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