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OLDs)> 기억해야 할 일곱 번째 소식, 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사건

1968년 베트남서 한국군 소행 추정 학살사건 일어나
가족 잃은 응우옌티탄 “전부 기억나…끔찍한 악몽”
퐁니·퐁넛마을 등 피해자들 하나 둘씩 세상 밖 나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각하·정부 항소로 안갯속
“죽기 전에 한국이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 보고 싶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단어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1968년 2월 한국군의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은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당시 74명이 살해됐고 17명이 다쳤다. 사진은 해당 사건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모습.&nbsp;[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nbsp;
1968년 2월 한국군의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은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당시 74명이 살해됐고 17명이 다쳤다. 사진은 해당 사건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모습. [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 

*해당 기사는 피해자 응우옌티탄(66)씨의 실제 증언(번역:이소희)과 한베평화재단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투데이신문 박효령·정인지 기자】 1968년 2월 24일. 베트남 남중부에 위치한 꽝남성 디엔반시의 마을에서는 가족을 잃은 한 소녀의 처절한 울음이 가득 메웠다. 그리고 55년이 지난 아직도 그의 울음은 한이 되고 악이 돼 마을 곳곳에 녹아있다.

당시 11살이었던 응우옌티탄씨는 악몽과 같았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날 한국군의 방공호 학살로 인해 어머니 레티토아이(46)씨, 남동생 응우옌반떰(8)씨, 작은어머니 팜티스(50)씨, 두 사촌동생 응우옌반닷(6)씨, 응우옌티씨(2)씨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렸던 그에게 마을로 들이닥친 한국군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침범 소식에 잠시 동태를 살피러 집 밖에 나간 탄씨의 시야에는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그 주변을 메운 뿌연 연기,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이웃들이 가득 찼다.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탄씨는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에게 이를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국군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한국군은 탄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지하로 내려가라며 총으로 위협했다.

결국 탄씨와 어머니, 작은 어머니와 이웃 주민 등 약 11명가량이 방공호로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웃집 어린 동생은 배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심한 부상을 입었다. 방공호는 금세 아픔과 고통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영문 모를 이들을 방공호에 밀어 넣은 한국군은 양쪽 입구를 막은 뒤 수류탄을 두 차례 던졌다. 첫 번째 터진 수류탄에 의해 작은 어머니와 사촌동생 응우옌티씨가 사망했다. 이어진 두 번째 수류탄에 어머니가 숨을 거뒀으며 이외에도 다른 이웃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당시 남동생 응우옌반떰은 한쪽 다리가 절단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과다 출혈로 결국 숨졌다. 사촌동생 응우옌반닷도 수류탄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목이 말라 밖으로 기어나가 물을 마시려다가 그만 목숨을 거뒀다.

가족을 잃은 것에 비통해 할 시간도 없이 탄씨는 수류탄에 다리를 다친 또 다른 사촌 동생 응우옌반딘(8)과 방공호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저녁께 돼서야 친오빠 응우옌꼬이(23)에게 구조돼 다낭의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탄씨의 상태도 온전치 못했다. 그는 수류탄으로 인해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했으며, 왼쪽 다리와 허리에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방공호로 내려가기 전 저는 한국군에게 멱살이 잡혔어요. 너무 무서운 나머지 어머니를 붙들며 엉엉 울었어요. 한국군은 방공호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어머니에게 총과 폭탄으로 위협했어요. 그렇게 내려간 방공호의 상황은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사방팔방이 피로 가득했어요.”(탄)

소녀의 가족과 그 삶의 터전에 큰 비극이 들이친 이날에 대해 세상은 ‘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지난 1960년에 조직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북베트남의 지원 하에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목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로 인해 한국, 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도 전쟁에 참전했고, 이로 인해 국제적인 전쟁으로까지 확대됐다.

이 전쟁 중에 자행된 하미마을 학살 사건은 지난 1968년 겨울 대한민국의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 침입해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총격해 살해하고 가매장했다고 추정되는 사건이다.

당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 대다수가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으며, 사건 다음날 불도저에 의한 주검 훼손까지 벌어졌다. 

위령비 뒷편의 비문을 덮은 연꽃 그림의 모습. [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nbsp;
위령비 뒷편의 비문을 덮은 연꽃 그림의 모습. [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 

이후 지난 2000년 하미 마을에는 숨진 영혼들을 달래고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위령비 뒷문에는 그날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모래와 뼈가 뒤섞이고 불타는 집 기둥에 시신이 엉겨 붙고 개미들이 불에 탄 살점에 몰려들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불태풍이 휘몰아친 것보다도 더 참혹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집 문턱에는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들이 떼로 쓰러져 있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들이 끙끙대며 신음하니 또 얼마나 공포스럽던가. 허둥지둥 시체를 쌓아 올리는데 악의 탄환이 관통하지 않은 시신이 없었다. 시체에는 여전히 마른 피가 고여 있고 아기들은 어머니의 배에 기어 올라 차갑게 시든 젖을 찾았다. 입과 턱이 날아간 아이는 목이 타는 듯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또 하나의 참극이 더해졌으니 탱크의 강철 바퀴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황혼이 서린 땅에는 풀이 시들고 뼈들은 말라가고 원혼이라도 나타난듯 구름은 푸른 하늘에 울부짖었다.  (하미 위령비 뒷면에 쓰여진 비문 일부)

 

하지만 현재 그 역사의 기록은 학살 내용을 제외하라는 일부 한국 참전 단체와의 갈등으로 인해 분홍색 연꽃 그림으로 가려둔 상태다. 20년 넘게 흐른 지금도, 그날의 참혹함은 연꽃 밑에 숨어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학살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끔찍한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라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기억이고, 앞으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악몽입니다.” (탄)

탄씨 등 5명은 올해 4월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역대 진화위의 1~2기 활동과 그간의 과거사 기구 전체를 통틀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관련 진실규명에 대한 최초의 걸음이었다.

진화위는 진실 규명 처리절차에 대해 통상 신청 접수일로부터 90일 이내(사전 조사 필요 시 30일 이내 연장)에 조사 개시 또는 각하 결정이 이뤄진다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하미 사건의 경우 결정을 보류한 채 속절없는 시간만이 흘렀다.

그러던 올해 5월 24일, 진화위는 제55차 전체위원회에서 하미 사건에 대한 각하 결정을 내렸다. 7명의 위원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진화위는 논의 끝에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 여부를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4대 3. 반대가 한 표 차이로 앞섰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5월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베트남전 '하미학살' 조사 개시를 촉구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5월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베트남전 '하미학살' 조사 개시를 촉구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진화위의 각하 결정에는 사실관계보다도 외국적 요소가 쟁점으로 작용했다.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은 같은날 각하 결론을 발표하면서도 “피해에 개연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문제와 관련해 국가책임도 없지 않다고 보여진다”는 말을 보탰다. 

다만 김 위원장을 비롯한 다수 위원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벌어진 외국인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제2조 제4항에 규정한 ‘권위주의 통치시기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과거사진상규명법에 따르면 외국인에 대한, 외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조사 대상에서 배제하는 규정이 없어요. 진화위가 진실규명 신청을 각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서 취소돼야 합니다.” (탄)

실제로 과거사 진실규명의 범위를 규정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정리법) 제2조에는 △외국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피해자가 외국인인 사건 등을 진실규명 대상에서 배제하는 규정이 포함돼 있지 않다.

동 조항의 제4호는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에 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혹사건”을 진실규명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외국 사건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이 없으므로 1968년 베트남에서 벌어진 하미학살 또한 원칙 상 배제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 또한 “하미사건은 권위주의 통치 시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사건임과 동시에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한다”며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 조사대상이 아니라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진화위는 같은날 회의에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안모 하사가 국군포로로 납북돼 월북자로 몰려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진실규명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이에 지난 7월 19일, 탄씨를 포함한 하미학살 피해자·유가족 5명은 서울행정법원에 진화위의 진상조사 거부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각하 결정에 따른 행정소송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응우옌티탄씨 [자료제공=한베평화재단]<br>
진실화해위원회의 각하 결정에 따른 행정소송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응우옌티탄씨 [자료제공=한베평화재단]

한베평화재단과 시민네트워크에 따르면 5인 모두 소송의 이유에 대해 “위원회 차원의 공식 조사는 못하더라도 이번 결정이 잘못된 것인 점만은 소송을 통해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위원회의 결정문을 보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고 화도 났습니다. 한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하미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때까지 요구할 거예요.”(탄)

소송은 베트남에 있는 피해자·유가족 5명을 대신해 한베평화재단과 시민네트워크가 대리하게 된다.

한편 탄씨와 동명이인인 또다른 응우옌티탄(63)씨는 마찬가지로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의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피해를 입었다.

퐁니·퐁넛마을 사건 당시 민간인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응우옌티탄(63)씨는 2020년 4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비무장 민간인이었던 자신과 가족의 살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지급을 요구하며 어떤 경우에도 무장 군인이 비무장 군인을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베트남전 참전 군인과 당시 마을 민병대원이 증언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재판부는 응우옌티탄(63)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68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대한민국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최초의 판단인 것이다.

그의 변호인단은 ‘이 판결이 대한민국이 피해자에게 보내는 최초의 사과문 1호가 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국가는 이내 사과문을 뭉갰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나 목격자의 진술만으로 우리 군이 가해자임을 입증할 수 없고,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베트남전 특성상 정당행위”라고 맞서던 정부는 법원의 판결에 항소했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베트남 외교부 팜투항 부대변인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항소한 점을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과거는 제쳐두고, 미래를 지향하자는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부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이로써 하미마을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철회로 인한 소송을, 퐁니·퐁넛마을 사건은 민간인 학살 피해 배상 2심 소송 절차를 진행 중이다.

“퐁니·퐁넛 학살에서 승소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참전군의 증언과 베트남 공화국 장군의 인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박물관에 퐁니·퐁넛 학살에 대한 모습이 담긴 작품이 있기도 했고요. 이런 점들을 통해 승소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하미는 군인 중 인정하는 이가 없었고, 학살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지요.”(탄)

그의 말처럼 베트남에서의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배상이 어려운 이유는 사실 확인이 어렵다는 것에 있다. 우발적으로 벌어지거나 만에 하나 조직적으로 발생했다고 해도 구두로 전달되거나 은폐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 측의 증거 뿐이다. 퐁니·퐁넛 사건의 경우 이례적으로 미군의 조사 보고서가 있었고, 관련자의 증언이 있었다.

이처럼 관련자의 증언은 진상규명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당시 참혹했던 현장을 생생하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중 일부는 용기 내 학살 현장을 증언하며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베트콩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마을 전체에 확산을 시켜버리니까, 노인이고 애들이고 할 것 없이 막 그냥…무차별로 그냥…그래서 그런 민간인학살이 생긴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나이 또래보다 조금 더 됐던 것 같아. 철조망 밖으로 내가 데리고 갔어. 데리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를 파고…거기 서라 해서, 그냥 총으로 사살하고 묻어버렸어” (<뉴스타파 목격자들 : 전쟁 1부, 두 개의 기억> 속 베트남전쟁 참전군인 인터뷰 내용 중 일부)

반면 증언도, 조사 보고서도 없는 하미 학살 사건은 55년이 흐른 지금까지 ‘한국군 소행 추정’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로 남아 있다. 피해자들은 누군가의 인정도, 사과도 받지 못해 멍든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갈뿐이다. 

피해자 응우옌티탄(66)씨의 모습.&nbsp; [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br>
피해자 응우옌티탄(66)씨의 모습.  [사진제공=한베평화재단]

대한민국 역사는 곧 ‘국난 극복’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외세로부터 수많은 고초를 극복하며 전개됐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허리가 끊긴 채 현재까지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광복 후 78년이 흘렀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에 대한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이 가해자였던 과거 문제 해결에는 뒷전인 모습이다. 지난 201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진상조사를 요구하자, 국방부는 “우리가 보유한 한국군 전투 사료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해당 사건이 공론화되고 난 뒤 무려 20년 만에 정부가 내놓은 첫 공식 답변이다.

또한 정부는 “교전 중에 발생한 사고이므로 위법성이 없다”, “당시 마을 사람들을 ‘베트콩’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라는 취지로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어린아이, 노인 등을 포함해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 마을 사람들은 비무장 상태였다.

과거의 아픔이 채 낫지도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우리 정부의 모습에 또 한 번의 상처를 얻었다.

위령비 뒤에 새겨진 연꽃 그림은 마치 자국의 잘못을 애써 가린 채 외면하는 우리 정부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가해자 없이는 피해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 죽기 전에 한국이 하미학살 사건에 대해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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