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OLDs)> 기억해야 할 다섯 번째 소식, ‘5·18민주화운동’
진압경찰 “추리닝에다 하이바, 쇠파이프 하나 든 상태로 나갔다”
광주시민 “아무리 부정해도 운동권으로 몰려 군홧발로 맞았다”
5·18 둘러싼 ‘폭동’·‘북한군 개입’·‘방송국 방화’ 주장 살펴보니
대법원 “내란 행위 아니라 헌정질서 수호 위한 정당한 행위” 判
유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월 속 민주주의를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투데이신문이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코너명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오래된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운구 차량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동하고 있다.&nbsp;[사진제공=뉴시스]<br>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운구 차량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동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시민들이 전개한 민중항쟁이다.

독재 세력에 맞서다 무고한 시민들이 대규모 학살당한 가슴 아픈 역사임에도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세력들로 인해 광주는 아직도 항쟁 중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5·18과 관련한 허위 주장이 나왔다. 지난달 27일, 전광훈 목사는 “폭동은 전문적 선동꾼에 의해 발생했다”며 “5·18에 북한의 고정간첩 세력이 동원됐다”고 주장했다. 

<투데이신문>은 그날을 기억하는 광주 시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43년 넘는 세월에도 풀리지 않는 광주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5·18민주광장 전경. 전방의 흰 건물(옛 전남도청)과 중앙의 분수대, 그 아래 회색 시계탑 모두 사적(史跡)이다.&nbsp;ⓒ투데이신문
5·18민주광장 전경. 전방의 흰 건물(옛 전남도청)과 중앙의 분수대, 그 아래 회색 시계탑 모두 사적(史跡)이다. ⓒ투데이신문

그날을 잊지 못하는 이들

“광주? 전라도 광주?” “빨갱이 묻어오는 거 아니야?” “취재해 봐야 뭐, 뻔하지” 

5·18을 취재하러 광주에 내려간다는 기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적절한 말을 고르다 그만 다문 입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답을 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 지난 17일 5·18민주광장 속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5·18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만난 이는 당시 광주 동구에 위치한 동부경찰서에서 의경으로 근무했다는 김모(64)씨였다. 자리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던 기자의 옆에서 인터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남들은 최전방 갔다 왔다고 해야 ‘고생깨나 했구나’ 하지만 5·18때는 후방이 진짜 전쟁이었다”며 울렸다.

김씨는 ‘기습 진압’이 제일 무서웠다고 회상하면서 “추리닝에다 하이바, 쇠파이프 하나 든 상태로 나갔다”고 설명했다. 말 사이 조금의 간격을 두곤 이내 “학교 끝나고 나온 전대(전남대학교) 생들 가방을 열어 불온서적 갖고 있는 아(애)들은 닭장차에 너부렀다(넣어버렸다)”며 “지금 생각해 보면 멀쩡한 아들 너붔는 지도(넣어버렸는지도) 모르제”라고 했다.

몇 걸음 앞에서는 김재용(65)씨를 만났다. 광주시민인 그는 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타 지역에 있는 일가친척들에게 부고를 돌려야 하는데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전화도 교통도 통제되고. 그럼 어떻게 해?”라며 자신이 자전거를 타고 당시 고립됐던 광주를 빠져나가려 해 봤다고 전했다.

그는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머리가 바듯이 짧았다. 내 머리가 짧으니까 학생이라 이거야. 너도 똑같다 이거야.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데모하는 학생으로 몰려 군홧발로 맞았다”고 털어놨다.

자리를 옮기려 탄 택시도 인터뷰 장소가 됐다. 택시운전사 이종숙(63)씨는 당시 광장 한 편에 있는 개인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그때 대학을 못 가고 바로 병원에서 근무했다”고 말을 뗐다. 

이어 “내가 병원에서 근무하는지 아니까 친구들이 시위하다가 화장실 가고 싶거나 진압을 피할 때 나한테 왔었다”고 말하곤 “근데 내가 그때 따뜻하게 대해준 게 아니라 ‘부모님이 어렵게 농사지어서 너희들 뒷바라지해주면 공부나 해야지’하고 사정없이 뭐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병원 건물에도 헬기로 총탄을 쏟아내고 창문이나 옥상에서 그 참상을 다 봤는데 뉴스 한 줄 나오지 않았다”며 “지나고 보니까 ‘걔네(친구)들은 대학 가서 깨우친 게 있었구나’하고 느꼈다”고 말했다.

광장 맞은편 전일빌딩 10층 천장과 기둥에 남은 총탄 흔적. 전일빌딩에만 지금까지 총 270개가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당시 해당 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며 탄도의 방향을 고려할 때 헬기에서의 사격 정황은 변함없다고 판정했다.&nbsp;ⓒ투데이신문
광장 맞은편 전일빌딩 10층 천장과 기둥에 남은 총탄 흔적. 전일빌딩에만 지금까지 총 270개가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당시 해당 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며 탄도의 방향을 고려할 때 헬기에서의 사격 정황은 변함없다고 판정했다. ⓒ투데이신문

그는 “그래서 나는 지금도 뉴스 안 보고 안 믿는다. 그때 너무 저기를 봐버려서”라 말 잇는 입술이 그리는 하강 곡선이 백미러에 비쳤다. 여전히 뉴스는 5·18에 대한 폭언을 서슴지 않고, 광주는 그런 뉴스를 보지 않는다.

광장에서 만난 이들은 자신이 계엄군도, 시민군도, 희생자도 아니었기에 국가가 묻지 않았던, 하지만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들이 가진 트라우마를 보고 어찌 희생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묻는 그날의 진실

5·18은 폭동인가. 이를 폭동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시위대가 계엄법이 금지하고 있는 불법 집회를 했고 방송국에 불을 질러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며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했다고 주장한다. 시민군이 계엄군을 선제 공격했다는 주장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먼저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계엄군의 비무장 시위대를 향한 조준 사격과 대규모 발포가 먼저 있었고, 이로 인해 총상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시민군도 무장에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회를 연 것과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사실이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5·18 내란 행위자들이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해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나. 북한군 개입설은 5·18을 북한 특수군 600여명이 일으킨 모략 작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계엄군의 진압 작전도 정당했다는 논리다.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2016년 5월 17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고 답했다.

2019년 2월 19일 국방부도 공식입장을 통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등을 검토했으나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양재혁 회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객관적 진실이 보편적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폄하 발언이 계속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어 “왜곡을 끊어내지 못해 돌아가신 영령들에 죄스럽다”면서 “헌법전문수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월 안에 담긴 민주주의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흘 간 이어진 항쟁은 5월 27일에 막을 내렸지만 올해도 전라도(島)는 18일에만 반짝이고 마는 실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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