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3000원…탑골공원에서의 세 끼
한 잔 당 1000원 하는 ‘잔술’ 또한 인기
“나이 먹곤 눈 떠서 갈 곳 있단 게 소중”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 ⓒ투데이신문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젊은 친구가 안 올 델 왔어. 여기 노파들 많은 곳” VS “이런 곳도 와 봐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알지!”

두 노인의 옥신각신이 시작됐다. 지난 5일 찾은 탑골공원에서 일대를 헤집고 다니는 기자가 눈에 띈 모양. 이야기의 소재가 된 김에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슬쩍 빼 끼어 앉았다.

둘은 서로가 옳으니 그르니 하며 한참을 다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세상의 통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차례로 언성을 높여갔다.

“젊은 친구들도 술만 먹고 영화관에서 놀고 이런 좋은 데만 갈 게 아니라 이런 데 한 번 둘러봄으로써 하루 공부를 하는 거야.”

“그 시간에 나라의 역군이 돼야지 이런 델 와 뭐 하겠나?”

“자기들도 결국 나이 들 것 아냐!”

언쟁 중에 대뜸 휴대폰을 꺼낸 한 사람이 나직하게 “다 돼 가네”라고 내뱉자 상대는 흰 콧김을 흥 내뿜더니 이내 말을 그쳤다. 이들은 공원 외곽 담벼락을 가득 메운 줄의 일부였다. 

탑골공원 앞 무료급식 대기줄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앞 무료급식 대기줄 ⓒ투데이신문

하나같이 오전 8시 30분이 되길 고대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 그들의 화해 계기이자 둘러앉은 이유였다. 길게 늘어선 줄의 꽤나 앞자리를 차지한 이들에게 “댁에서 몇 시에 나오셨냐”고 묻자, 새벽 5시에 나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청년이 세상을 더 봐야 한다고 주장한 쪽이었다.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한다는 70대 A씨는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거, 노인네에게 다섯 시가 무슨 문제가 되겠나”하고 입술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A씨는 “술 담배 외에는 낙이 없다”며 “24시간 365일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라고 했다.

절약하기 위해서는 걸어오는 게 제일 좋지만, 서대문구에서 종로까지 서너 시간이 걸리는 만큼 혹한기에는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오전 7시 이전에 버스 타면 20% 할인”이라며 “기본요금 1500원에서 1200원이면 얼마나 크냐”고 친우(親友)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에 B씨는 “그러게 지하철을 타고 와야지”라며 “아직 65세(무임승차 기준 나이)가 안 됐던가? 허긴 가까이 사는 편이니까. 우리같이 밥 받으러 상경하는 사람들 하곤 다르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원각사 무료급식을 받으러 경기도 의정부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노인복지 향상을 위해 민간 운영되는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제공한 아침 배식. ⓒ투데이신문
노인복지 향상을 위해 민간 운영되는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제공한 아침 배식. ⓒ투데이신문

주어진 아침 만찬은 주먹밥과 단무지 세 장, 그리고 국이었다. 국은 소고기뭇국과 미역국, 된장국 세 가지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이날은 된장국이었는데, A씨는 “된장국이 괜찮더라고. 그래 하나 받아다 줄까?”하고 물어왔다.

식사를 안주삼아 플라스틱 병 소주를 연거푸 비우던 C씨 역시 “왜 길거리에서 밥을 얻어먹고 사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 궁금하냐”고 물었다.

C씨는 “각자 사연이야 다르겠지만, 못 살았든 잘 살았든 노년에는 너무 외롭다”며 “난 나쁘지 않게 살았는데, 가족들 눈살이 무서워 일찍 나온다”고 입을 쩝 뗐다.

그러면서 “이 나이 먹고 눈 떠서 올 곳이 있고, 만나면 친구가 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게 소중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고 말하는 새 꼴꼴 따르던 소주가 넘쳤다.

C씨는 “에잇. 노인네들 밥 때우는 걸 봐 뭐 한다고”하면서도 “점심때 또 온다고?”라고 되물었다.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제공한 점심 배식. 한 노인이 원각사 측에서 마련한 실내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국은 아침과 동일하게 된장국. 반찬은 콩나물 무침과 버섯 나물, 무 절임.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제공한 점심 배식. 한 노인이 원각사 측에서 마련한 실내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국은 아침과 동일하게 된장국. 반찬은 콩나물 무침과 버섯 나물, 무 절임. ⓒ투데이신문

시간은 성실히 흘러 점심시간. 두 세 시간 전부터 다시 늘어진 줄은 정오가 되자 움직임을 보였다. 점심 배식이 시작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점심시간에는 1층에 마련된 실내 공간을 포함, 2층도 개방됐다. 긴 시간 추위에 떨던 이들은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식판을 받아 들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C씨 또한 “왔냐”며 아는 체 해 왔다.

식사 자리에는 누가 틀었는지 모를 ‘뽕짝’과 70년대 음악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또 다른 이도 선곡에 나섰다. 대화 없이 고개 숙인 채 식사를 하던 C씨는 이어폰 없이 휴대폰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다. 광고를 넘긴 그의 유튜브 기록에는 ‘들국화 모음집’이 남게 됐다.

원각사 관계자는 “매일 200분에서 여유분으로 230인분 정도를 준비한다”며 “물가가 올라 재료 준비에 점점 힘이 부치지만, 그래도 드시는 걸 보면 열심히 운영할 동력이…”라고 설명했다. 말을 마치지 못한 까닭은 식사를 마친 노신사가 잘 먹었다는 인사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무료급식소 실내 공간 출입구 앞에는 따뜻한 물이 준비돼 있었다. 이 관계자는 익숙하게 “다 드셨어? 약 챙겨 드셔야지. 점심 약 이거 맞아요?”라며 노인을 챙겼다. 노인은 겉옷 주머니에서 꺼낸 푸른색 약통을 돌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온수 역시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었다. 

탑골공원 인근의 한 식당. 황태 해장국은 4000원, 우거지·콩나물 해장국은 3000원이다.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인근의 한 식당. 황태 해장국은 4000원, 우거지·콩나물 해장국은 3000원이다. ⓒ투데이신문

비슷한 시각 외식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많은 인파가 국밥집을 찾았다. 대부분이 3000원 하는 우거지 해장국을 주문하는 이들이었다. 입장하면 인원에 맞게 각자의 국밥이 일사천리로 나온다. 이 같은 패스트푸드가 또 없었다. 빠른 회전율을 위해 원탁에서 타인과 함께 식사하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낯선 이와 거리낌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야 맛있다는 둥, 등산하고 여길 와야 몸이 개운하다느니 하는 벽 없는 대화가 오갔다. D씨는 “지난해 7월부터 2500원에서 3000원으로 올랐다”며 “그래도 이 가격과 맛은 다른 덴 없지. 저렴한 걸 먹는다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했다.

식사 후에 입가심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커피. 이들 역시 처음 만난 게 맞나 싶게 어깨를 맞대고 커피를 주문했다. 위치는 ‘티타임’ 자판기, 메뉴는 ‘맛있는 커피’, 가격은 300원. 각자의 담배를 꺼내 들고 사는 얘기를 나누며 담배와 커피를 번갈아 즐기기도 했다. 두 가지 다 뜨거운 물질이라, 중간중간 노인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곧장 하하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괜찮으시냐고 물을 뻔했다.

탑골공원 인근 커피 자판기. 오른쪽에는 반계탕이 5000원 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인근 커피 자판기. 오른쪽에는 반계탕이 5000원 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투데이신문

밥과 커피는 이들의 머리를 팽팽 굴렸다. 바삐 움직이는 손과 각자의 수를 읽는 눈에는 젊음의 형형함이 비쳤다.

훈수 두는 이들도 분주했다. “졸(卒)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그럼 마(馬) 죽잖아. 차라리 대차가 낫다”며 불쑥 끼어들었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기도 했다. 마땅히 누구 편을 든다기보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지원하는 모양이었다.

장기를 두는 어르신이 기물을 탁 하고 놓는 소리와 훈수 두는 주변인의 목소리는 한참을 웅웅 울렸다.

대국을 지켜보던 노인은 “두는 친구들 보면 평균 75세 이상”이라며 “수를 세야 해서 치매에도 못 걸린다. 치매 오는 사람은 백에 한 명”이라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860만분의 1이라고 하는데, 특히 바둑은 지금 5000수 되지 않나”라며 “(바둑의 확률은) 8000억이 돼도 한 판도 같은 게 안 나온다”고 설명했다.

탑골공원 인근 낙원상가 앞에서 장기 두고 있는 노인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인근 낙원상가 앞에서 장기 두고 있는 노인 ⓒ투데이신문

시간은 어느덧 오후 네 시 남짓. 배도 제법 꺼졌겠다, 돌아다니는 동안 몸도 얼었겠다, 이를 헛헛하게 데울 만한 술 한 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자판기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완벽한 코스.

이곳은 막걸리와 소주 두 종류의 술을 한 잔 당 100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야외에서 선 채로 마셔야 하는 대신 자리에는 강냉이와 마른 멸치, 김치·야채전, 다시마 등의 무료 안주가 준비됐다.

마침 노년의 여성 둘이 주문하던 차였는데, 이들은 “춥긴 한데 재밌지 않나. 아들 흉 좀 보러 왔다”고 웃어 보였다.

이어 “내가 클 때는 어른들은 그저 어른이지 어떻게 사는지는 몰랐거든.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고”라며 “근데 노소(老少)를 떠나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예술에 관심이 있는지, 차(茶)는 뭘 좋아하는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도 자기 엄마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 누구든 분명히 아플 날이 올 텐데, 육신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걸. 과정을 알게 되면 좋겠다. 그게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탑골공원 인근 송해 거리의 한 주점 가판대. 왼쪽부터 강냉이, 마른 멸치, 김치전, 다시마, 야채전 등 안주가 놓여 있다. ⓒ투데이신문
탑골공원 인근 송해 거리의 한 주점 가판대. 왼쪽부터 강냉이, 마른 멸치, 김치전, 다시마, 야채전 등 안주가 놓여 있다. ⓒ투데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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