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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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고물가로 인한 국민 부담이 높아지면서 대통령까지 나서 범정부 차원의 물가안정화를 주문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정부가 말하는 국민에서 농민은 빠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아 물가 상황을 점검하고 민생경제점검회의를 주재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장바구니 물가를 내릴 수 있도록 농산물을 중심으로 특단의 조치를 즉각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물가가 국민의 첫 번째 관심사이자 정책 성과를 바로 체감하는 기본 척도”라며 “현장에서 속도감 있게 정책들을 추진해 달라”고 독려했다.

농축산물 물가관리에 대통령까지 나선 계기는 ‘금사과’로 이름 붙여진 사과값 상승이다. 총선이 1달여 앞으로 다가온만큼 정부도 장바구니 물가 잡기에 다급한 모습이다.

정부는 1500억원 규모의 긴급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을 추가로 투입해 ▲농산물 납품단가 지원 확대 ▲유통업체 농축산물 할인 예산 확대 ▲관세 인하 적용 과일류 31만톤 신속 도입 ▲관세인하 품목 추가 발굴 및 물량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쉽게 말해 사과 가격 할인을 지원하는 동시에 바나나, 망고, 파인애플, 오렌지, 체리 등 수입 과일을 들여 사과를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농산물 할인 지원은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지만 동시에 농축산물 유통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최종 유통업체에게도 이익이다. 문제는 생산부터 소비자의 장바구니까지 여러 유통단계 중 최종 유통업체만 큰 이익을 볼 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납품단가 지원까지 곁들여지며 이중으로 수혜를 입게 됐다.

사과값 상승은 기후변화로 지난해 봄에는 냉해와 우박 피해, 여름에는 폭우와 폭염이 겹치며 병충해까지 돌아 생산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사과농가와 사과산지유통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정부 지원은 물가 관리를 명분으로 대형마트 등 최종 소비유통업계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들에게 사과는 수많은 취급품목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정부가 관세까지 인하하며 들이는 각종 수입과일은 사과만 대체하는 게 아니라 모든 국내산 과일을 대체하게 된다. 장바구니에 바나나와 오렌지가 이미 들어갔는데 국내산 딸기나 감귤까지 손이 미치겠는가. 

농민들 입장에서는 한 해 농사를 망친데 그치지 않고 국내산 과일을 찾던 소비자마저 수입과일에게 내주게 된 셈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그 해의 농사를 망친 것보다 더 큰 타격이다.

이에 농업계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관세인하를 통한 농축산물 수입 확대는 안 된다고 한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 한국농축산연합회는 15일 총선 농축산분야 공약 요구사항으로 이상기후 재해예방·복구지원대책 마련과 함께 농축산물 저율 및 무관세 수입정책 중단을 제시했다. 

축산관련단체협의회도 15일 식량안보를 위한 수입 농축산물 무관세 국회 심의 개정을 총선 공약으로 요구했다. 정부의 지속적인 농축산물 수입 확대를 국회가 나서 견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금리·고물가의 팍팍함을 농민이라고 빗겨 갔겠는가. 그런데 정부가 말하는 국민에 농민은 왜 포함이 안 되는건가.

지난해 1월 경북 예천군의 한우농민이 경영난에 힘들어하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농가는 새로 축사를 신축하며 많은 부채를 지게 됐고 금리 인상과 사료값 폭등, 소값 폭락이 겹치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에는 지난 2일 경북 상주시의 한 농민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복숭아농사를 지은 이 농민은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포도와 사과 등을 산지유통도 했다. 이에 선도농업인으로 선정되고 경북 농어업인대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농민이었으나 농가부채의 압박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농업계에선 예전부터 ‘정부가 하라는대로 농사 지으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규모화, 현대화를 요구하며 더 많은 투자, 그리고 더 많은 융자를 권한다.

그러나 정부는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물가관리를 명분으로 억제한다. 어떤 때엔 정작 농산물 가격은 오르지도 않았는데 전체 물가관리를 위해 억제하기도 한다. 생산에 투자는 많이 했는데 정작 판매로 수익을 못 보니 망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윤석열정부는 출범한 2022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입 농축산물에 대한 관세 인하를 광범위하게 확대해 왔다. 윤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외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농업계 인사들은 속으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18일 성명에서 정부의 농축산물 물가대책에 대해 “깨진 독은 내버려 둔 채 물만 쏟아 부어대며 생색만 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가상승의 원인인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재해에 대한 대처와 농산물 수급안정보다 당장의 물가관리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19일 “단기적 방편이 중장기적 물가안정과 식량안보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면서 중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농산물 수급정책과 농지 보전정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은 눈 앞에 다가온 총선에서의 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표만 눈에 보이고 피폐해진 농업, 텅 빈 농촌, 노인만 남은 농민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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