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고도성장과 문화적 다양성 접한 세대
노무현 정부 계기로 정치적 각성 일으키기도
수직적 사회에서 수평적 사회로 넘어가는 단계

시위 현장에 나선 40대들 ⓒ뉴시스
시위 현장에 나선 40대들 ⓒ뉴시스

【투데이신문 홍상현 기자】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40대의 절반 가까이는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 진보 정당까지 합치면 60%를 차지한다. 국회의원 300명 중 180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나 진보 정당 소속이라는 수치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중간 세대인 40대가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각종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우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민주당 바라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힘은 더욱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40대는 87년 민주화운동 세대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학교 다닐 때 학교 공부에 열중하느라 선배들이 민주화운동을 한 사실마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세대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권의 실체를 몸소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에도 “국부가 사망했다”면서 펑펑 울었던 세대다.

또한 밤 9시만 되면 울려 퍼지는 땡전뉴스를 시청해야 하는 세대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 다닐 때 정치적 의식은 별로 성장하지 못했던 세대다. 물론 대학교 시절에도 뚜렷하게 정치적 의식이 성장하는 그런 계기가 없었다.

80년대 고도성장의 풍요로움을 몸소 경험했던 세대고, 90년대 X세대의 문화적 다양성을 체험한 세대다. 따라서 정치적 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선배 세대보다는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인 87년 민주화 세대보다 40대가 오히려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더 높다.

그것은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세대인 50대는 87년 민주화를 이끌어낸 세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군부독재 정권이 만들어낸 철저한 수직적 문화에 익숙한 세대였다. 선배 문화를 비롯해 학생회 문화 등 군부독재는 수직적 문화를 학교에 끌어다 썼고, 그것을 몸소 체험한 세대가 50대 이상이다. 그들은 오후 4시만 되면 국기 게양대를 향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으며, 월요일 아침만 되면 조회라고 해서 운동장 한복판에서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는 군부독재에서 나온 군대 문화이며,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황국신민 문화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50대는 87년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지만 철저히 수직적 문화에 체득된 사람들이었다. 반면 40대는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수직적 문화에서 수평적 문화로 바뀐 것을 체득한 사람들이다. 더 이상 학생회는 존재하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아도 되고, 월요일 아침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상상력을 더욱 펼칠 수 있는 그런 세대가 됐다. 여기에 80년대 고도성장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80년대 비디오테이프 시대가 도래했고,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어릴 때부터 ‘미국 문화’가 아닌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됐다.

또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구권도 문호를 개방했고, 그 결과 다양한 세계 문화 유입이 국내 대중가요로 터지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른바 아이돌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PC 통신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선배 세대인 50대보다 다양한 매체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고, 토론도 할 수 있게 됐다. 선배 세대들은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장소에 모여 논의를 해야 했지만 이제 앉아서도 전 세계 어느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는 PC 통신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정보를 이제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진보적인가

또한 선배 세대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는 점이다. 선배 세대는 일부 사람들만 대학을 갈 수 있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다면 40대부터는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진학률도 상당히 높았다. 4년제 대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각 지방마다 종합대학교가 설립되면서 많은 대학들은 학생들이 필요하게 됐고, 이에 대학 진학률이 어느 세대보다 높은 세대가 바로 40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세대에 비해 고학력자가 많이 배출됐다는 점도 정치적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와 더불어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사상의 자유도 풀리면서 군부독재 시절에는 금서로 규정했던 많은 책들이 금서에서 해제되면서 다양한 사상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찾아왔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마저도 금서에서 해제되면서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됐다.

하지만 40대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정치적 각성을 하지는 못했다. 비록 김대중 정부가 됐다고 하지만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40대가 아니라 오히려 50대 즉 87년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주역들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대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전 경기지사 김문수 등이 한나라당으로 향하고, 많은 진보 성향 학자들이 보수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진보 성향을 띠기보다는 정치적 의식은 보수에 가까웠다.

더욱이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제국되면서 공산주의는 종언했다고 판단하면서 진보 진영은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해서 보수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운동권 인사들을 대거 보수 정당에 유입시킴으로써 진보 진영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 정부는 이런 위기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민련 전 김종필 총재와 연합해서 연합 정권을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진보 진영만으로 결코 완전히 독립된 정부를 탄생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보 진영에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40대에게는 드라마틱한 상황이었고,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됐다. PC 통신으로 다져진 그들이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신문의 탄생을 통해 댓글 문화를 접하게 됐다. 이들은 댓글 문화 등을 통해 그들만의 결속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신문이 탄생된 것은 진보 진영에게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하게 된 셈이다.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보수 인터넷 신문을 창간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신문은 진보 진영의 해방구와 같았다. 이미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다양한 사상을 접했던 40대들은 인터넷 신문을 접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고, 이를 통해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기성세대가 조·중·동 등 종이신문으로 세상을 접했다면 40대는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세상을 접하면서 사상적 기반을 다지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노무현의 출현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당시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이라고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자리 숫자의 지지율을 가지고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국 순회 연설을 통해 노무현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공헌은 ‘국민경선제’다. 그리고 그 국민경선제의 뒷받침은 현 40대가 했다. 이들은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고, 그들이 국민경선제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뒤집어졌다. 한 자리 숫자 지지율이었던 노 전 대통령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는 기성 정치권에게 공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해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를 만들어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으로 후보 단일화가 된다면 함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를 승낙했다. 위기를 느낀 40대가 결집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후보 단일화에서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정몽준 후보를 꺾고 단일화가 됐다. 하지만 대선 바로 전날 정몽준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깨버렸다. 그러자 40대는 또다시 결집했고, 투표장에서 투표로 실력행사를 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탄생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드라마틱 하면서도 지금의 40대에게는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40대만으로 진보 진영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정치적 각성이었다. 그런 각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에는 촛불집회를 통해서 발현됐다.

물론 그 이전인 2002년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도 있었다. 하지만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시민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또다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이었다. 그리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또다시 정치적 각성을 하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자신들이 노 전 대통령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무기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40대는 급속도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이 과반 이상 의석을 확보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끄는 한나라당에 번번이 참패를 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탄생됐다. 그 이후에도 진보 진영 정당은 번번이 참패를 했다. 그런데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당과 시민사회세력이 하나가 되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게 되면서 친노 인사들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그리고 민주당은 계속해서 온라인 투표 등을 만들어 내면서 40대의 참여를 독려했다. 40대의 정치적 각성을 또다시 하게 된 계기는 2016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 과정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었는데 끊임없이 분당 위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실제로 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이 탈당을 강행하자 오히려 40대는 온라인 당원 가입 열풍을 일으켰다. 이때 가입된 당원만 해도 100만 명은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온라인 당원 가입 열풍이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정치적 각성 계기

그리고 2016년부터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40대가 주도하면서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튼튼한 콘크리트 지지층이 됐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을 보낸 것처럼 문 대통령도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성 언론이 계속해서 문재인 정부를 흔든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닥문’(닥치고 문재인) 혹은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인 이유가 단순히 문재인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래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런 대깨문 현상은 포스트 문재인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전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20년 장기 집권 발언을 한 것도 40대에게는 ‘꿈’이 아닌 ‘현실’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꿈꿨던 탈권위주의, 특권타파, 검찰개혁, 자주국방 등을 문재인 정부를 통해 구현하려 하고 있고, 여기에 언론개혁까지 포함해서 포스트 문재인 정부에서 구현하기를 바라고 있다. 즉, 노무현 정신을 이어가는 문재인 정부와 그 정신을 이어가는 정부를 바라고 있다. 이런 이유로 2022년 대선 정국에서 40대는 주도적인 역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제 40대에서 50대로 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는 기성세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다시 어떤 정치적 각성을 할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여러 가지 도전은 있다는 점이다. 현 20대에 페미니즘의 유입으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만 남녀 갈등 문제도 더욱 깊어지면서 보수화 경향도 보이고 있다. 또한 취업 문제 등으로 인해 공정성 논란에 휩싸이면서 보수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40대가 진보 성향이라면 20대가 보수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세대 갈등은 분명히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기성세대로 접어든 40대가 이제 막 사회에 들어온 20대를 어떤 식으로 끌어안고 갈 것인지 두고 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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