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뉴시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의혹에 대해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이 인정된다는 취지의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6일 인권위에 따르면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전날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 인권위는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방안 및 2차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비서실 업무관행 개선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구제 제도 개선을 서울시에 권고했다.

여성가족부장관에게는 △공공기관 종사자가 성희롱 예방교육을 모두 이수할 수 있도록 점검 강화 △공공기관 조직문화 등에 대한 상시 점검을 통해 지자체장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예방활동을 충실히 할 것 △지자체장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발생 시 독립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기구에서 조사해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 △실효성 있는 2차 피해 예방 및 대처가 가능하도록 관련 규정 정비·매뉴얼 마련 등을 권고했다.

아울러 “상급기관이 없는 지자체장의 경우 성희롱·성폭력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성평등한 조직문화 정착을 위한 원칙을 천명하는 선언이나 입장표명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에 이 같은 자율규제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 사건에 대해 지난해 7월 30일 직권조사를 결정하고 서울시장 비서실 운용 관행, 박 전 시장에 의한 성희롱 및 묵인·방조 여부,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절차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사했다.

서울시 비서실 운용 관행에 대해 인권위는 “피해자는 시장의 일정 관리 및 하루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하는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및 명절 장보기 등 사적영역에 대한 노무까지 수행했다”며 “이 같은 비서업무의 특성은 비서와 시장 간의 친밀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공적관계가 아닌 사적관계의 친밀함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울시는 시장 비서실 데스크 비서에 20~30대 신입 여성 직원을 배치해 왔다”며 “비서 직무는 젊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고정관념, 즉 시장실 비서는 ‘서울시의 얼굴’이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등 타인을 챙기고 보살피는 돌봄노동·감정노동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인식과관행이 반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박 전 시장의 언동이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자료 및 박 전 시장의 행위가 발생한 당시 이를 피해자로부터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봤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에 근거할 때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시간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 한 손톡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며 “이 같은 박 전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도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인권위는 피해자의 주장 외에 행위 발생 당시 이를 들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이 부재하거나 휴대전화 메시지 등 입증 자료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인권위는 인정사실만으로도 성희롱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

성희롱에 대한 서울시 직원들의 묵인·방조 여부에 대해서는 “참고인들이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묵인·방조했다고 볼만한 객관적 증거는 확인하기 어렵다”면서도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또 피해자가 서울시 비서실 직원에게 성폭력을 당한 ‘4월 사건’을 서울시가 인지한 후 가장 먼저 가해자를 다른 부서를 전보 조치했으나 피해자와 업무관련성이 있는 부서였으며, 가해자가 피해사실을 축소·왜곡해 외부에 유포했음에도 이를 방치했고, ‘4월 사건’을 최초로 인지한 부서장은 사건 담당부서에 관련 내용을 통보하는 등 제대로 된 피해자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인권위는 또 “서울시가 ‘4월 사건’에 대한 조사요구와 함께 2차 피해에 대한 조치를 요청했음에도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서 “이 같은 서울시의 행위는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 피소사실 유출과 관련해서는 “경찰청, 검찰청, 청와대 등 관계기관은 수사 중이거나 보안 등을 이유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조사에 한계가 있어 피소사실이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된 경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은 9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직급 공무원”이라며 “두 사람이 권력관꼐 혹은 지위에 따른 위계관계라는 것은 명확하고, 이 같은 위계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조직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 본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직권조사를 실시하면서 우리 사회가 성희롱 법제화 당시의 인식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음에 주목한다”며 “우리 사회의 성평등 수준이 외견상 많은 진전을 이뤘으나 고용, 정치 등 주요 영역에서 성별격차는 여전하고, 성희롱에 대한 낮은 인식과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피해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향후 성희롱에 대한 실효성 있는 구제뿐 아니라 차별적 환경과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병행할 것”이라며 “피해자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기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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