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글 써서 먹고삽니다.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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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대학 시절 호기심에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선 큰 충격을 받았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복잡한 자연현상을 간결한 수식으로 표현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빈부격차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을 간결한 수식으로 증명했다. 과연 사회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통찰이었다. 금세 이 놀라운 사상이론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결단이 서면 나름 행동이 신속한 편이라 이내 인터넷 공간에 <자본론> 학습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았다. 참가자들에게 <자본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면, 그들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눈을 떠 사회 개혁 운동에 관심을 가지거나 참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대체로 이러한 교육 활동을 하는 이들은 인문·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탄탄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하다.

모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제법 있어서 수차례에 걸쳐 <자본론> 학습모임을 진행했는데, 참가자들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일부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진보정당이나 사회단체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거나 간혹 극도의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왜 이들은 예상과 달리 냉소적으로 반응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2006년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글이나 말에는 제법 자신이 있던 터라, 직접 연설문을 작성해 곳곳을 다니며 핸드마이크를 이용해 즉석에서 연설했다. 보수 양당의 기만적인 행태를 폭로하고 왜 민주노동당이 대안인지를 열심히 설득했는데, 심드렁하게 듣던 노숙자가 연설이 끝나자 손뼉을 치고 한 할머니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곧 이 착각을 단번에 날려버린 경험을 하게 됐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열심히 듣던 할머니 두 분이 연설이 끝나자 조용하게 손뼉을 쳐 주어서, 뭔가 통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약 오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로고송을 튼 홍보차량이 지나갔다. 그러자 두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음악에 맞춰 어깨와 무릎을 흥겹게 흔드는 것 아닌가.

눈앞의 광경에 충격을 받고 일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몇 분짜리 연설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말이다. 고작 5분 동안 세 치 혓바닥이나 나불거렸던 주제에,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두 할머니가 살아온 70년 이상의 그 긴 ‘시간’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살아온 ‘시간’을 계산해보자. 20살이면 17만 시간, 30살이면 26만 시간이 훌쩍 넘는다. 가령 30대 청년과 마주 앉아서 2시간 정도 마르크스 <자본론> 내용을 강의하면서, 상대의 생각을 180도로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것보다 오만한 생각이 없다. 왜냐고? 상대방이 살아온 26만 시간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6만 시간 동안 형성되어 온 뇌세포의 복잡한 연결 구조가 어떻게 한두 시간의 혀 놀림으로 휙휙 바뀔 수 있겠는가. 인간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존재라면, 그동안 살아온 26만 시간은 도대체 뭐가 되겠는가. 그런 식이라면 상대방이 불쾌해하는 게 당연하다. 자신이 살아온 26만 시간이 부정 당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회과학 지식이 넘친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던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상대방과 소통해야 할까? 상대방이 살아온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해야 한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상대가 내 관점으로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라고 긍정한 후, ‘그런데, 관점을 바꿔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현하자. 상대의 삶을 부정하면 나 역시 거꾸로 부정당할 뿐이다. 나의 수십만 시간과 상대의 수십만 시간이 진실 되게 만나도록 하자.

나와의 한두 시간 남짓한 만남이 그래도 조금은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일 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 글이 독자의 가치관을 순식간에 뒤흔들 것이라는 주제넘은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설사 그렇게 될지라도 말이다. 그저 독자가 내 글을 읽는 찰나의 시간이 조금은 인상적인 순간이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뭐가 이렇게 까다롭냐고? 당연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수십만 시간이 켜켜이 쌓인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망한가. 우리는 그렇게 허망한 존재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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