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지난 9월 30일 낮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민주노총에서 일했던 ◯◯◯라고 합니다. 그리고, 페이스북 친구예요.”

“아! 네에! 안녕하세요.”

“일면식도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드려 죄송해요. 평소에 쓰시는 글 잘 보고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이번 10월 20일에 총파업을 하는데, 보수언론과 정부의 마녀사냥이 심할 것 같아 걱정됩니다. 혹시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지지하는 글을 써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연락 드렸어요.”

“그럼요. 써야죠. 어차피 저도 버린 몸이고 이번 생은 글러먹었거든요. 민주노총 총파업을 지지하니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와인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언제 제가 꼭 와인 한번 대접할게요.”

이내 통화를 끝냈다. 나는 알고 있다. 와인 대접을 못 받을 확률이 99%라는 것을. 이런 류의 부탁을 받고서 실제 술 한 잔 제대로 얻어먹은 기억이 없다. 서운하냐고? 전혀! 노동자 서민이 주인 되는 평등 세상을 위해 삶을 갈아 넣는 이들의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알기 때문이다. 나랑 술 한 잔 마시는 것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달랑 전화 한 통 받고 이런 글을 쓰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대장동 투기판에 한배를 타고 50억이니 120억이니 하며 더러운 이익을 나눠 먹는 이들, 유력 정치인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한 자리 차지하려고 손바닥을 똥파리처럼 전심전력으로 비벼대는 이들은 더욱 이해 못 할 일이지.

인간에 대한 신뢰는 만난 시간의 길고 짧음이나 이익의 공유 여부만으로 생겨나는 건 아니다. 삶의 방식과 궤적, 그리고 지나온 삶이 남긴 향기를 통해 통화 1초 만에 깊은 신뢰가 형성되기도 한다. 충분히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사회변혁을 위해 가시밭길이 빤히 보이는 길에 투신했으며 지금껏 배신하지 않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침 민주노총 홈페이지 자료실에 접속해 보았다. ‘1020 총파업 1만 현수막 걸기’라는 제목으로 9가지의 현수막 파일이 올라와 있는데, 거기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 모든 노동자 노조할 권리 보장, 노조법 2조 개정하라!

● 불평등과 차별의 온상, 비정규직 철폐하라!

● 5인 미만 사업장 차별 철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적용하라.

● 5인 미만 사업장 차별 철폐, 근로기준법 적용하라.

● 돌봄∙의료∙교육∙주택∙교통, 국가가 책임져라!

● 국가가 책임지는 무상돌봄 실시하라!

● 일방적 해고와 구조조정 금지, 일자리 국가책임제 실시하라!

● 대학까지 무상교육, 교육공공성 확대하라!

● 불평등 OUT! 평등사회로 대전환! 10월 20일 민주노총이 합니다!

현수막 문구에는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민주노총에 대해 집요한 마녀사냥을 펼치는 이유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비정규직을 고용해 인건비를 후려쳐서 배를 불리는 이들, 노조를 탄압하고 무력화시켜 노동자를 시키는 대로 빡빡 기는 노예로 만들려는 이들, 노동자의 생명은 뒷전이고 안전장치에 들어가는 비용만 아까워하는 돈버러지들, 돌봄·의료·교육·주택·교통 부문의 민영화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에게 민주노총은 위협적인 세력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총의 목소리가 커지면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노동자이며 서민인 국민 상당수가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이 민주노총에 씌운 불온 딱지에 휘둘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민주노총에게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다. 철저한 방역을 통해 확진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는 집회를 했는데도, 민주노총 위원장이 뜬금없이 구속되어 감옥에 있다. 정말로 방역이 문제였다면 민주노총 집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하고 방역에 악영향을 끼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현장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조치가 없는가. 참으로 역겹고 후안무치한 일이다.

최근 트럭시위를 하며 사측의 부당한 행태에 항의해 주목을 받은 스타벅스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연대 움직임을 즉각 거부했다. 자신들은 노조가 아니며 민주노총의 관심이 필요 없고 스타벅스코리아는 노조 없이 22년간 잘 지냈다는 것이다. 이 뉴스를 접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투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노동자로부터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정말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한창일 때에 민주노총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민주노총 위원장 되면 뭐 하나. 나중에 감옥이나 갈 텐데...”

왜 우리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공공성이 확충되는 복지사회로 나아가지 못할까. 비정규직 철폐와 사회 공공성 실현을 최일선에서 외치는 이가 감옥에 가고, 심지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조롱당하는데 그 사회에서 무슨 진보가 가능하겠는가.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욕먹고 감옥에 가는 이 부조리한 세상은 과연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의 목소리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비로소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게 욕먹을 걸 알고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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