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내외 경기침체, 반도체 사업으로 승부수
선택과 집중, 과감한 ‘기술 투자’로 경쟁우위
‘불량품은 범죄행위’로 규정...‘질경영’ 선언
문어발 사업 확장... 삼성전자의 발목 잡아

반도체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의 미래가 곧 국내 경제의 미래라는 말은 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대·내외 경기침체 신호와 더불어 반도체 산업 내 점유율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삼성은 다시 한번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시점은 지금 상황과 유사한 환경이었다. 고유가에 따른 고물가 그리고 내수 부진과 저성장. 그러나 이 회장이 이끄는 삼성전자는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전 부문에 걸친 혁신으로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이건희 회장이 일궈놓은 반도체는 오늘날에도 미래먹거리라는 4차산업의 핵심이다. 이제 삼성의 키는 그의 아들 이재용 신임회장이 쥐고 있다. 30년 전 미래산업의 변화를 예측하고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일궈낸 이건희 회장을 톺아보고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를 다짐한 이재용 신임회장의 ‘뉴 삼성’에서 한국 경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찾아보고자 한다.

[사진제공=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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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박중선 기자】 지금의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신경영 선언으로부터 시작됐다는데 이견이 없다. 2021년말 기준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매출액은 약 95조4000억원, 영업이익은 약 29조2000억원을 달성했고, DX(TV,모니터 냉장고 등 가전제품)부문의 매출은 약 166조원, 영업이익 약 17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률은 약 30.6%, DX부문 영업이익률 10.48%로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의 캐시카우(주요 수익 창출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이 회장이 결심하고 뛰어든 반도체 사업이 삼성전자를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회장의 선구안은 신경영 철학에서도 나타났다. 이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창업회장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이 되면서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만든다는 제2창업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으로 압축된다. 이 회장은 세계 시장에서의 삼성의 초라한 위치를 목도하고 심각한 위기를 느꼈다. 이에 이 회장은 ‘나부터 변화한다’는 ‘신경영’ 체제를 정립한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언한 이 회장의 신경영 체제는 한 세대 가까이 삼성을 견인해온 그룹의 철학이다.

[사진출처=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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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쌀’ 반도체를 경작하다

1970년대 후반 대·내외 경제 상황은 지금과 유사했다. 유가 상승에 따른 국제수지 적자, 치솟는 물가와 소비위축 그리고 경기침체. 이 회장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인 하이테크에 초점을 맞췄다.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그의 판단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반도체는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산업으로 진입장벽이 높고 가격과 수익성의 진폭이 크다는 점에서 기술과 자본 모두 부족했던 우리나라가 쉽게 뛰어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한국반도체는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는 수준의 회사로 당초 구상하던 반도체 사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국반도체를 디딤돌 삼아 반도체 산업을 키우고자 했다. 결심과 동시에 빠른 행동이 이어졌다. 1977년 12월 인수를 완료하고 그 다음해 ‘삼성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한다. 세계 1등 반도체 회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은 미국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거의 매주 일본으로 직접 넘어가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지도를 받았다. 때로는 일본의 기술자를 주말에 한국으로 초청해 직원들에게 기술 지도를 하도록 했다. 이후 정부로부터 인수한 한국전자통신을 1982년 12월 삼성반도체와 합병해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설립하고 반도체 산업을 위한 후속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1988년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를 합병하고 반도체 개발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16메가 D램을 선진국과 거의 같은 시기에 개발하고 1992년 8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내놓으면서 반도체 선두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사진제공=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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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타이밍...“남들보다 먼저, 다르게”

이 회장이 미래 산업으로 반도체를 낙점하고 뛰어들기로 결심했지만 플레이그라운드는 까다롭고 리스크가 높았다. 기술개발의 속도가 어느 산업보다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미리 예측하고 막대한 선행 투자를 최적의 타이밍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 회장은 반도체를 ‘타이밍 산업’이라고도 했다. 

1993년 당시 반도체를 이끄는 선두 기업들의 반도체 생산라인은 6인치 웨이퍼*가 표준이었다.

*웨이퍼: 실리콘(Si), 갈륨 아세나이드(GaAs) 등을 얇은 원판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이 웨이퍼 위에 동일 회로를 만들어 반도체 직접회로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해 6월 반도체 5개 라인을 8인치 웨이퍼로 설치하는 과감한 투자를 단행한다. 8인치로 하면 6인치에 비해 생산성은 크게 개선되지만 당시 선두 기업이었던 일본조차 기술적인 문제로 실행하지 못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막대한 손실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안전한 6인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후발주자로서 남들보다 빠른 기술개발 속도와 차별화된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과감한 선택을 한다. 바로 ‘남들보다 먼저’ 정신이다. 이러한 이 회장의 선택에 삼성 내부에서는 거센 반대가 있었다. 모험적이다 못해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결단을 내린 그해 하반기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의 쾌거를 이루며 일본 업체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 미국과 일본 등 기존의 반도체 선두를 달리던 업체들과의 기술격차도 계속 줄어들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1994년 국내 기업으로는 첫 100억달러 ‘수출의 탑’ 기록을 세웠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 등을 포함한 약 5개 이하의 업체뿐이다. 이유는 해당 산업 특성상 유동적인 반도체 가격에 따른 수요와 공급 불일치를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 D램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많은  경쟁 기업들이 낙오했다.

세계 3위 D램 반도체 생산업체 독일의 키몬다가 2009년에 파산신청을 했고, 일본 내 유일한 D램 반도체 생산업체였던 엘피다가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에서 버티지 못하고 2012년 법정관리에 들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회장은 금융위기와 업체 간 출혈경쟁에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투자를 통해 정면 돌파했고, 현재까지도 삼성전자는 D램 반도체 부문 시장점유율 40% 이상 차지하는 세계 1등 D램 반도체 회사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반도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업이다. 4차 혁명의 핵심 분야라고 일컬어지는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에 반도체 기술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다시 한번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D램 반도체에서 재고가 쌓이고 있고, 최근 빅테크 기업들의 수요가 커지고 있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16%(2022년 1분기 기준)인데 반해 대만의 TSMC는 시장점유율 50%가 넘는다. 이 회장이 현재 삼성전자의 수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제는 그의 아들인 이재용 신임회장의 몫이다.

[사진제공=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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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신경영’으로 위기 돌파

삼성은 1970년~80년대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면서 미래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1990년대 들어 한국경제는 경기 침체의 늪에 빠졌다. 삼성도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은 고사하고 기초체력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당시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41조3646억원이었으나 세전이익은 매출액의 1%대인 594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다 보니 기업의 현금흐름은 말라갔고 부채는 늘어만 갔다. 자기자본이 5조9007억원인데 비해 부채총계는 35조를 넘어 부채비율은 600%에 육박했다. 특히 1993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따르면 당시 삼성그룹의 은행 대출은 4조2520억원으로 30대 재벌그룹 중 가장 많은 빚을 내고 있었다.

산업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애널리스트들이 기업분석을 할 때 적정 부채비율을 200% 수준으로 잡는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의 삼성은 부실한 회사로 볼 수도 있었다. 이를 파악한 이 회장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이 회장은 한국기업들의 고착화된 양적 성장 경영방식을 버리고 ‘질경영’으로 나아간다는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한다. “처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말로 축약되는 이 선언은 지금까지도 삼성 내부와 기업인들 사이에서 위기 때마다 회자 되고 있다. 

1990년대 이전의 국내 산업은 대규모 투자로 인한 장치산업의 급성장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즉, 대량 생산으로 인한 규모 확장이 성장률을 높여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의 한계에 다다르자 이 회장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혁신과 창조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전자의 현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해외 선진국들을 직접 방문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이 회장이 직접 보고 느낀 삼성전자 제품은 선진국들의 제품에 비해 형편없었다. 수출한 제품 중 불량품이 많아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재고 취급도 못 받는 현실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제품의 질적 성장을 작심한다. 생산에만 집중한 성장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임원들을 급히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호출하고 삼성이 처한 상황을 힐난했다. 불량품 생산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철저한 질 위주의 경영을 주문했다. 

그 일환 중 하나로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라인스톱제란 생산과정에서 불량이 발견될 경우 해당 생산라인 전체를 중단하고 문제점을 모두 해결한 후 재가동 시키는 제도다. 그러나 이미 양적 성장 방식에 익숙한 사업장에서는 라인스톱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불량품을 ‘암’에 비유하고 극약처방에 나섰다. 바로 ‘불량제품 화형식’이다.

1995년 당시 불량품으로 수거된 무선전화기 15만대(약 150억원)를 소각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교환해 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당시 삼성의 무선전화기의 불량률은 10%를 넘는 수준으로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을 통해 불량은 곧 암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임직원들에게 각인 됐고 불량률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량률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이 회장이 회장 취임식에서 선언한 ‘초일류기업’에 다가설 수 없었다. 이 회장은 기술개발을 통한 품질향상만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품의 일류화, 이른바 ‘World Best’라는 슬로건으로 품질 경쟁력이 핵심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삼성전자가 전세계 휴대폰 부문 애플과 양강구도를 형성하는 초석이 됐다. 

현재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삼성전자의 가장 오래된 기록인 1998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은 약 20조원, 순이익은 3132억원 수준이었으나 2021년 기준 매출은 약 279조6000억원으로 14배 성장했으며, 영업이익은 51조6000억원으로 무려 160배의 성장을 이뤘다. 이는 일찍이 기술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품질향상에 사활을 걸었던 이 회장의 공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제공=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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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발목 잡은 문어발 확장

반도체 사업의 성공으로 이 회장은 자신감이 붙었다. ‘복합화’라는 명분 아래 사업확장을 본격화했다. 당시 이 회장은 복합화에 대해 서로 연관성 있는 인프라, 기술 등을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오늘날 강조되고 널리 영역을 넓히고 있는 ‘융합기술’ 개념을 이미 30년 전에 고안한 것이다. 

이미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진행돼오던 계열사 확장은 이건희 회장에 의해 광범위한 분야로 뻗어나갔다. 제조업은 물론 금융, 병원, 대학, 문화산업 등 국내 사업 중 삼성이 손대지 않은 사업 분야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나 계열사 간 사업 분야가 중복돼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지는 등 복합화의 야심찬 청사진은 이내 빛이 바랬다. 특히 무리한 외형성장은 오히려 주력 사업의 걸림돌이 되었다. 대내외 경기 불안으로 계열사들의 부실이 발생하자 삼성전자가 계열사에 지원한 채무보증 등의 부담을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95년 당시 반도체 가격마저 급락하면서 삼성전자는 경영악화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1978년 10월 6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당시 삼성은 섬유·무역·제당·전자·제지·건설·보험·조선·기계·임업·호텔 등 백화점식으로 33개의 기업을 거느리며 문어발식 경영에 나섰다. 특히 자기자본의 뒷받침없이 금융기관의 부채와 타인 자본에 의존한 기업 인수로 재무구조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보도됐다.

결론적으로 문어발식 사업분야 확장은 레벨업을 하고 있던 삼성전자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 ‘남의 발목을 잡지 말라’고 강조했던 이 회장의 말이 무색한 결과다. 신경영 선언을 통해 모든 것을 바꾸라던 메시지에서 정작 당시 재벌기업들의 과욕에서 비롯된 문어발식 외형성장의 틀은 바꾸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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