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좋아하는 민중가요 중에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가 있다. 요즘 정서에는 다소 생경한 가사이지만, 서정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내게 투쟁의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그러나 한 걸음 또 한 걸음
어느새 적들의 목전에
눈물 고개 넘어 노동자의 길 걸어
한 걸음씩 딛고 왔을 뿐
누가 나에게 이 길을 일러 주지 않았네
사슬 끊고 흘러넘칠 노동 해방 이 길을

내 경우 꼬드긴 사람 없이 스스로 사회주의자의 삶을 선택했다 보니, 제목이나 가사가 좀 더 와닿는 구석이 있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삼십 년 전 대학생이 사회주의자가 되는 경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선배의 권유로 멋모르고 운동권 학회나 동아리에 가입해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토론하며 의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선배와 함께 집회에 참여하고 투쟁에 연대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이로 인한 불평등을 목격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로의 결의를 세운다.

하지만 주변에 운동권 선배도 없고 학회나 동아리에 가입한 적도 없는 천연 공대생이었던 나는, 어쩌다가 우연히 읽은 마르크스 <자본론> 내용에 충격을 받고 닥치는 대로 사회과학 도서를 구해서 탐독하다가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사고 회로가 공대생답게 참으로 단순하고 우직한 구석이 있어서, 사회주의가 정의롭고 올바른 길이라는 판단이 서니 뭔가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내는 공대 출신인 나랑 결혼해 살면서 무척 편하다고 한다. 내 사고 체계가 단순명쾌해서 속마음이 투명할 정도로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라는데. 내 생각을 이해하려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겠지. 어쨌든 나는 딱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단순하고 투명한 사람다운 일차원적 실천에 나섰다. 나 자신이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 변화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히자! 그렇게 해서 여러 차례 <자본론> 학습모임을 꾸려서 사람들을 모아 함께 공부했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해서 열심히 진보 정치활동도 했다. 대학 전공과는 멀어지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서는 어느새 사회주의 성향의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직접 책을 써서 다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진정 걷잡을 수 없는 노빠꾸 인생이다.

이런 인생 이력을 접한 사람의 반응은 대개 둘로 나뉜다.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마다하고 대의를 위해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용기와 결단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비현실적인 이상론에 심취해 삶이 불안정해지는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고 혀를 차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두 의견 모두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치 내가 고난을 감내하면서 ‘대의’ 혹은 ‘허상’을 위해 헌신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건 사실과 전혀 다르다. 나는 오히려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선택했다.

젊은 시절에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직장인 생활을 5년가량 했다. 그 생활을 지속했다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울 텐데, 왜 그만뒀을까? 학력고사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받아 소위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 인기 학과에 진학했지만, 막상 공부해보니 전공이 적성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었다. 입학한 게 아까우니 꾸역꾸역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까지 땄고 그 관성으로 직장생활도 했지만, 내내 행복하지도 않았고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깊이 잠들어 꿈꾸는 시간이었을 정도였다.

숨쉬기 답답할 정도로 습기가 들어찬 사우나실에서 극한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가 청량한 바깥 공기를 흠뻑 들이켜 본 적 있는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주의자 정체성을 드러내며 전업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순간이 딱 그러했다. 드디어 폐부 깊숙한 곳까지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 공기를 들여 마시는 순간마다 진정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게 어떻게 희생이고 헌신일 수 있는가? 지금 당장 행복해지려는, 전적으로 카르페 디엠에 충실한 선택이었다. 더 넓은 집에 살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멋진 옷을 입었을 때 예상되는 행복감보다, 내가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믿는 사상과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알렸을 때 얻는 행복감이 월등하게 크다고 느꼈기 때문에, 삶의 전환에 망설임이 없었다.

호주의 브로니 웨어라는 사람은 호스피스 간호사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비슷한 후회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2.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3.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4.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5.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이다. 통장 잔액을 더 늘리지 못한 것, 수영장 딸린 저택에서 살아보지 못한 것, 명문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채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을 후회한다. 최악의 경우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만 연연하다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놓쳐, 결국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을 발견했고, 그 일을 하면서 (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운 좋게 그럭저럭 생계도 해결되고, 내가 하는 일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차별 없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니 말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순간에 후회가 적을 것 아니겠는가.

자신이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인식이 강해질수록, 그에 비례해 욕구불만과 보상심리가 커져 마음속에 괴물 한 마리를 키우게 된다. 이것이 자칫 소영웅주의나 지나친 권력욕과 조급함, 최악의 경우는 변절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매일 아침에 내 이름이나 책 제목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그러다가 정성이 담긴 독자 후기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내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증거 아닌가. 종종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에 초청되어 강의하는데,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는 청중의 눈빛을 보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다. 이렇듯 활동 자체에서 행복감과 보상을 얻으니, 욕구불만의 포로가 되거나 보상심리의 덫에 걸릴 일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자의 진정한 카르페 디엠이요 덕업일치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행복해지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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