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결정권 없는 농민, 수매가 모른채 추수부터
여주통합RPC, 전국 유일 농민 수매가 결정 참여
운영위 구성부터 진통 ‘100억 적자’ 누구 책임?
생계 보장되는 가격에 생산물 판매할 수 있어야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있는 한 농민의 창고에 올해 수확한 햅벼를 담은 톤백이 적재돼 있다. ⓒ투데이신문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있는 한 농민의 창고에 올해 수확한 햅벼를 담은 톤백이 적재돼 있다. ⓒ투데이신문

지구는 만성화되는 기후변화와 식량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사회분야별 논의는 무르익지 않고 있다. 여러 분야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농업이 그러하다.

유엔은 지난 2018년 12월 17일 총회에서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채택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그 내용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월 19일 이른바 ‘농민기본법’이라 불리는 농민·농업·농촌정책 기본법이 국민동의청원을 거쳐 국회에 회부됐으나 21대 국회 내 통과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도시에서 살다보면 농업에 대해서는 시장 장바구니 물가 걱정할 때나 각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시 우리나라가 양보하는 항목 정도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대중들의 농민권리와 농민기본법에 대한 관심도 역시 낮은 모습이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농민권리선언에 담긴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밝히고 농민들 스스로는 자신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장취재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한번 훼손된 환경을 다시 되살리기 어렵듯 농업 역시 마찬가지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를 직시할 때가 됐다.

【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일반적으로 소비자는 이미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고 상품을 구입한다. 개인간 거래가 아닌 이상 가격은 상품을 파는 판매자가 정한다. 또, 상품을 먼저 받은 뒤 값을 치르는 후불 방식보다 선불 방식이 더 보편적 거래형식이다. 

그러나 농산물을 생산해 이를 판매하는 농민 대부분은 가격결정권이 없다. 농산물 유통의 중심인 농산물도매시장은 경매가 주를 이룬다. 직거래나 현지 로컬푸드 매장, 일부 계약거래에서나 생산자인 농민에게 가격결정권이 있을 뿐이다.

농협 등에서 수매를 해도 품질에 따라 가격을 정해 매입한다. 물론 원칙적으로 농협의 조합원은 농민이지만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입장과 농산물을 구입해야 하는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매년 가을철마다 전국 농촌이 쌀값 결정으로 들썩이는 이유 중 하나다.

정부는 올초부터 수확기 산지쌀값 20만원(80㎏) 이상을 지키겠다고 거듭 공언했다. 지난해 기록적인 쌀값 폭락이 농가 경제에 큰 충격을 던졌음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계청이 밝힌 2022년 농가경제조사 결과 가구당 평균농업소득은 948만5000원으로 전년도 대비 26.8%나 내려갔다. 이는 지난해 산지쌀값이 15만5016원(9월 25일 기준)까지 추락했던 영향이 컸다.

이달 5일 산지쌀값은 21만7552원으로 정부의 장담대로 20만원 이상을 유지했다. 그러나 산지쌀값은 농민들이 실제로 받는 벼값을 뜻하는 게 아니다. 농민은 ‘벼’(조곡)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쌀’(정곡)을 구입한다.

농민들이 실제로 받는 벼값은 대부분 지역농협 차원에서 결정된다. 민간정미소에서도 쌀을 수매하지만 지역농협 벼 수매가가 해당지역 벼값의 기준이 되기 십상이다. 지역농협은 농민들에게 벼를 수매해 미곡종합처리장(이하 RPC) 또는 벼건조저장시설(DCS) 등에 저장한 뒤 쌀로 가공해 유통한다.

지역농협들끼리는 쌀 등의 농산물 사업을 규모화해 시장협상력을 높이고자 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조공법인)을 꾸리기도 한다. 대개 각 지역농협들이 출자해 조공법인을 구성하고 그 조공법인이 지역농협 쌀사업을 합쳐 통합RPC를 운영하는 구조다. 이들 농협 통합RPC는 지역쌀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개발해 시장협상력을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해마다 수확철만 되면 각 지역마다 농협과 쌀농민간 벼 수매가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가을걷이가 처음 시작되는 경기강원지역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벼 수매가가 결정되기 때문에 경기지역에서도 벼 수확량이 많은 여주시, 이천시의 수매가 결정이 전국 벼값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여주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쌀농민들이 수매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보장된 지역이다. 그런데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여주농협통합RPC)은 정작 올해 벼 수매가를 지난해보다 더 인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수확기 산지쌀값은 20만원 이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작 여주쌀농민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인 셈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들녘에서 지난달 27일 한 농부가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들녘에서 지난달 27일 한 농부가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여주, 벼 수매가 인하…산지쌀값 상승효과 어디로

여주농협통합RPC는 여주시 관내 8개 지역농협이 출자해 이들 농협의 쌀사업을 통합했다. 여주지역은 약 4만톤의 벼를 생산하는데 이 중 3만톤 내외를 수매할 정도로 지역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 

통합RPC의 쌀 수매가는 출자한 8개 지역농협 조합장들이 이사로 참여하는 이사회에서 결정된다. 다만 여주농협통합RPC는 그동안 운영위원회에서 쌀 수매가를 심의해 결정한 안을 이사회에 제출해 이 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을 취해왔다.

운영위원 임명은 이사회에서 결정하나 그 구성은 지역농협 조합장과 이사, 통합RPC 대표, 농협중앙회 여주시지부장, 여주시 농업정책과장 등과 함께 생산자대표와 농민단체 대표들도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쌀 수매가 결정에 농민의 의견이 일정 수준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체계를 갖췄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주농협 통합RPC는 앞서 운영위 구성부터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통합RPC 이사회는 지난 7월 운영위를 개편해 생산자 대표와 농민단체 대표를 제외시키고 총원도 줄였다. 지역농민들이 반발하자 다음달인 8월 운영위는 총원 14명에 농민이 4명(생산자 대표 2명, 농민단체 대표 2명) 참여하는 구성으로 변경됐다.

농협의 벼 수매는 몇몇 품종을 선별해 진행한다. 이른바 수확량이 많은 ‘다수확 품종’보다 ‘고품질 품종’을 수매하는 경우가 많다. 여주농협 통합RPC는 지난해 벼 수매가를 동결해 진상 품종을 9만원(40㎏ 최고가 기준)에 매입했다.

새로 구성된 운영위는 올해 벼 수매가를 진상 9만2000원, 추청 8만2000원으로 결정하는 안을 합의해 이사회에 올렸다. 그러나 이사회는 지난달말 운영위 합의안보다 각각 1만원 낮은 진상 8만2000원, 추청 7만2000원에 벼 수매가를 결정했다.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이달초 긴급이사회가 열렸으며 결국 진상 8만5000원, 추청 7만7000원으로 수매가를 다시 조정한 상태다. 이는 진상 품종을 기준으로 지난해보다 5000원 낮은 가격이다.

여주농협 통합RPC는 수매가 인하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통합RPC는 올해에만 무려 100억원 남짓한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산지쌀값이 폭락했는데도 벼 수매가를 낮추지 않고 동결한 여파가 막대한 적자로 돌아왔다는 해석이다.

통합RPC 이사인 여주 가남농협 김지현 조합장은 “지역내 민간정미소들은 지난해 쌀 수매를 거의 안하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통합RPC로 벼가 몰려 3만3000톤이나 수매했다. 그런데 인근 이천시보다 대략 40㎏ 1가마당 5000원씩은 더 수매가를 매겼다”고 설명했다. 같은 경기미 경쟁지역인 이천시 관내 농협들보다 약 40억원 가까이 수매가를 더 들여서 대규모 적자가 났다는 설명이다.

김 조합장은 “현재 조정한 수매가대로 운영해도 내년 50억원 가량의 적자가 예상된다”라며 “8개 지역농협이 벼 수매가 보전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그 정도”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조합원인 농민들이 다 벼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다. 다른 작목을 농사짓는 조합원 입장에서는 조합이 벼농가만 위해 적자를 보전한다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통합RPC의 경영부실에 대해서는 엄중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김 조합장은 “2년 연속 적자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려야 한다”라며 “최근 통합RPC에 대한 경영컨설팅과 농협중앙회 감사를 요청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경영컨설팅과 감사 결과는 조합원들에게 공개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또, 운영위에 대해서는 “올해는 운영위 안대로 벼 수매가를 결정했다간 몇몇 지역농협은 출자배당금조차 지급하지 못할 수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운영위에서 농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올해는 사정이 어려웠지만 운영위에서 합의한 안이 이사회 심의를 거쳐 통과하는 과정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 여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가 내건 현수막이 걸려있다. ⓒ투데이신문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 여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가 내건 현수막이 걸려있다. ⓒ투데이신문

수매가 동결돼도 손해인데 인하라니 농민 반발 높아

여주지역 곳곳에는 농민단체들이 붙인 쌀 수매가 인하 반대 현수막들이 게시돼 있다. 여주시농민단체협의회 김영준 사무국장은 “쌀 수매가를 동결했더라도 고물가로 생산비가 크게 올라간 상황이라 순이익은 전년보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인하를 한다니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수매가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추수할 때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개별농가로서는 수확한 벼를 장기간 보관하기도 마땅치 않다. 통합RPC 외에는 민간정미소를 찾아야 하는데 이 곳 역시 쌀값 하락에 타격을 입긴 마찬가지라 별반 사정이 다를 리 없다.

10월 중순 무렵이면 여주지역 들녘은 벼 수확을 거의 다 마친 상태다. 게다가 주력인 진상미는 9월부터 추수에 들어가 미처 수매가가 얼마인지도 모른채 통합RPC로 나락을 보내야 했다. 이는 여주지역뿐 아니라 전국 모든 쌀농민이 겪는 현실이다.

여주시농민단체협의회 김영준 사무국장은 “지역농협 상당수가 수매가 끝난 뒤에 수매가를 결정한다. 심지어 1월에 수매가 결정하는 곳도 있다”라며 “그래서 쌀값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사례는 보통 농민에게 기본적인 선지급금만 주고 쌀값 추이를 본 뒤 차후에 정산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한 해에 딱 한 번 있는 돈 들어오는 시기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것이다. 농협으로서는 대금 지급 시기가 늦춰지는만큼 이득이다. 게다가 여주지역처럼 제도적으로 농민들에게 수매가 결정 참여가 보장된 지역도 없다. 이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인데도 지역농협들은 쌀사업에서 적자를 보기 일쑤다.

지난해말 기준 농협RPC는 132곳이 운영 중이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동안 농협RPC 누적적자만 1464억원에 달한다. 농협 벼 전국협의회에 따르면 RPC가 없는 지역농협 쌀사업 손실액도 물경 1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여주농협 통합RPC 적자가 100억원이 넘게 나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구조다. 수익이 나지 않는 쌀사업을 통합해놓고 쌀농가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왜 지역농협 쌀사업을 합쳐 통합RPC를 애써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통합RPC의 존재 이유는 규모를 키워 시장에서의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의도인데 1개 시군의 쌀을 모은다고 유통대기업을 상대로 협상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냐는 지적이다. 

김 사무국장은 “농협중앙회에서 만든 규정례를 보면 통합RPC(조공법인) 이사회와 운영위에 대한 조항도 있다. 다만 운영위는 ‘만들어야 한다’가 아닌 ‘만들 수 있다’로 명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농협중앙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농협중앙회가 수매가 결정에 농민들이 참여하는 길을 보장하고 쌀사업에 적극 나서 시장협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지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수라청연합농협미곡처리장(RPC)에 지난 12일 추수한 벼를 싣고 온 차량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수라청연합농협미곡처리장(RPC)에 지난 12일 추수한 벼를 싣고 온 차량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외식커피보다 물가 가중치 낮은 쌀, 가격 억제 필요한가

정부는 산지쌀값을 중심으로 쌀값 문제에 대응하고 있으나 현장 농민들에게 와닿는 정책이 되려면 20만원이라는 단순 수치를 넘은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임병희 사무총장은 지난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해 “산지쌀값으로 결정되는 공공비축미 가격은 농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물량은 불과 10% 수준”이라며 “쌀 농가의 농업소득은 벼 민간 수매가격이 중심”이라고 짚었다.

고물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정책적으로 농산물 가격을 억제하는 것은 농업소득만 감소시키지 실제적 효과가 없다는 우려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임 사무총장은 “정부의 약속인 ‘80㎏ 20만원’ 가격목표는 낮아진 쌀값을 높이겠다는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라면서도 “쌀 농가의 요구는 농촌 정주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농업소득을 주업인 쌀 소득으로 얻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쌀값이 유지 또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려면 정부양곡 공매나 물가안정대책 같은 외부요인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은 25일 성명을 통해 “농산물 가격만 잡는 무의미한 물가정책을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전농은 “현재 소비자물가지수 품목별 가중치를 보면 주식인 쌀조차 400여개 품목 중 39위에 불과하다. 외식커피, 빵보다 낮은 순위”라며 “대다수 농산물 품목의 가중치는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놀이시설 이용료 가중치가 1.4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당 품목들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지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농민권리선언 제16조는 적절한 소득에 대한 권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당항목을 보면 “국가는 농민이 적절한 수입과 생계를 보장하는 가격으로 지역, 국가, 권역 시장에서 생산물을 판매하는 데 필요한 운송수단과 가공, 건조, 저장 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국가는 농민과 그 가족들이 지역, 국내, 권역 시장에 적절한 생활수준을 확보할 수 있는 가격에 생산물을 판매하도록, 완전하고 공정한 접근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시장을 강화하고 지원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농민들은 비싼 농산물 가격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안정된 소득이 보장되는 가격을 원하고 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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