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br>
▲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지난 2011년 4월 원인불명의 급성 폐렴을 앓는 임산부, 영유아 환자가 잇따라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질병관리본부는 원인미상의 폐 손상의 원인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지목했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가습기살균제 화학 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1827명이다. 이와 관련해 피해 구제를 신청한 사람은 총 7870명이며, 이들 중 피해지원 대상자수는 5212명이다.

인정된 피해자만 해도 5000명 이상인 전대미문의 참사이지만 무려 12년이 지나도록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은 감감무소식이라니. 참 의아할 일이다. 그렇게 사법부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한 사이, 가해기업으로 꼽히는 SK케미칼·애경·이마트 등은 책임공방으로 시간을 끌었고, 주무부처인 환경부는 이들 사이에서 뒷짐만 져왔다.

긴 시간 동안  가해기업에 대한 정당한 처벌도, 피해자 구제도,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니 피해자들은 매일 상처를 입었고 그 아픔을 호소하면서 살아왔다. 가해자 없이 ‘피해자’들만 존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된 셈이다.

그러던 중 지난 9일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손해배상을 제기했던 이는 앞서 지난 2007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던 A씨다.

그는 지난 2013년 5월부터 폐 질환을 앓아왔다. 그는 질병관리본부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호소했지만, 지난 2014년 3월 3등급 판정을 받았다. 당시 정부는 폐 질환을 앓는 시민들을 가습기살균제와 질환, 영향력 등을 판단해 구제해 줬는데, A씨는 이때 피해를 인정받지 못해 정부와 제조사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억울했던 A씨는 제조사인 옥시를 상대로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2심은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제조사들이 그의 건강적 문제가 가습기살균제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고 제대로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2심의 논리를 최근 대법원이 받아들이면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처럼 1심의 판결이 뒤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가습기살균제와 인체 간의 연관관계를 증명하는 연구결과와 이로 인해 이어진 지난 2017년 통과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 제정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10여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나온 이번 손해배상 판결에 대해 정작 피해자들은 웃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 피해자들은 지지부진하던 이번 판결이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과 가해기업 처벌에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피해 구제를 받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배상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500만원’이라는 보상금 지급이 피해구제의 모든 ‘결과’가 될까 우려하고 있다. 즉, 내년 1월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선고를 앞둔 시기에 이 같은 판결은 기업들에 ‘배상금 500만원만 주면 된다’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대법원 판결은 이어질 다음 재판에서 선례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첫 배상 판결에도 마냥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해당 판결이 나온 당일 피해자 측에 직접 물어본 결과, 12년 동안 크게 조명되지 않았던 사건을 대법원이 재조명해 판결을 내려준 것은 의미 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시적 피해가 확인된 상황에서 앞으로 재판부는 단순한 배상금 제시를 넘어 피해자들의 고통과 애환을 풀어줄 수 있는 진짜 결과를 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건강 피해를 넘어 청춘도, 인생도, 가족도 모두 잃을 정도로 매일 고통의 나날을 보낸 피해자들의 세월을 500만원이라는 똑같은 숫자로 메겨서는 안 된다.

더욱이 5000명의 피해자를 만든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및 판매한 기업도 더 이상 사회적·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을 회피하지 말고, 더 늦지 않게 피해자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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