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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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심심한 영화의 최고봉은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2008)라고 생각한다. 1년 만에 불쑥 찾아와 빌려 간 돈을 당장 갚으라는 희주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병훈은 하루 동안 희주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십시일반 돈을 꾸어 돈을 갚는다. 한때 사랑했었던, 헐렁하고 물렁하기 그지없는 성격의 병훈을 따라다니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를 향해 한껏 날이 서 있던 희주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진다. 소극장의 단막극처럼 단출한 장면들을 생동하게 해주는 두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영화 내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관찰’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관찰한다는 것, 혹은 누군가를 관찰하기 위해 근거리에 멈춰 서서 같은 풍경 속에 속한다는 것이 주는 마술적인 힘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상반된 성향의 두 사람은 같은 상황을 놓고도 정반대로 해석하곤 하는데 그중 한 장면에서 병훈은 “좋게 보면 좋은 거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나빠보이는 거”라고 말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 심오하면서도 심심하기 그지없는 개똥철학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일단은 보아야 한다는 것. 대상을, 상황을, 관계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겉으로만 보든 꿰뚫어 보든, 보고 잊어버리든 마음에 담아두든, 보아야 한다는 것. 일단 보기 위해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술이 시작된다는 것.

첫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에서 조용우 시인 또한 일단 본다. 거두절미하고 본다. 굳이 볼 것이 없어도 보고, 달리 보이지 않을지라도 본다. 그렇게 생활을 들여다보다 보면 보는 것이 생활이 되고 어느 순간 생활이 시인을 본다.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를 오래된 코트를 시장에서 사 입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따위가 적혀 있는 그것을 친구가 번역해 읽어준다.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그의 코트를 입고 있는 나, 그가 사려고 했던 것들을 살 수 있는 나를 발견할 때 그의 생활과 나의 생활이 겹치는 모습에 화자는 경탄한다(「세컨드핸드」).

혹은 “서울대학교암병원 3층 테라스로 나가면/창경궁이 아주 잘 내려다보인다/그때는 그곳이 창덕궁이라 착각했지만/아름다웠”다고 회상하는, 어떤 사정으로 그곳을 드나들었을지 알 수 없는 이의 시선에는 “내 안에 남아 있는 1파운드의 빛”이 떠올라, 그 “물컹하게 남아 있는 빛을 휘저”으며 머릿속의 풍경으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반죽해낸다(「테라스」). 시인은 본 것, 보았던 것의 심상이 마음에 남아 제멋대로 일으키는 현상들을 다시금 지켜본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곳 근처 도로변을 걷다 예닐곱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본” 것을 떠올리는 일이 “기억이 아니라 책에 써진 문장을 읽고 머릿속에 그려 보는 일처럼 느껴”진다는 고백에 뒤이어 느낌 속의 바로 그 책이 갖는 물성과 특성이 생생하게 튀어나오기도 한다(「여름 소설」).

그러나 시인은 보는 행위가 보는 이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현상뿐만 아니라 보는 행위의 내막, 보는 이의 사정도 들여다본다. 탐조에 취미가 있었지만 더는 그렇지 않은 작은 이모를 떠올리면 “흩어졌다 뭉치는 새 떼//수천 마리의 새 겨울 검고 푸른 하늘”을, 이모의 말대로 “본 사람만 기억할 수 있는” 그런 경이를 더 이상 보지 않으려는 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아득해지고 만다(「버드 워칭」). 그렇게 누군가의 신변과 마음에 와글와글 벌어졌다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을 시인은 조용히 몸을 떨며 지켜본다. 무언가를 보기로 감수하고 누군가를 보기를 감행하는 일이 이토록 보는 이의 마음을 저밀지라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면/모두 잊어야 한다면/종종 멈춰 서/흔들리는 나무들을 쳐다봐야 하리라”(「일요일 타르트」).

왜냐하면 보는 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간 유원지에서 “돼지고기 타는 냄새 작은 아이들의 작은 목마와 일찍 취한 아저씨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지난 일들을 떠올리는 가운데, “단것을 끊임없이 마시고 씹어 넘기면서 좋은 일이 있어서 정말 기쁘다 (…) 말하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면서” 화자는 그들의 눈빛을 본다. “눈빛은 마음을 비추는 그런 것”임을, “눈빛도 빛”이라는 사실을 화자는 놀라움 속에 곱씹는다(「유원지」). 무언가를 보는 이는, 자기 외부의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호수처럼 비춰보이는 이의 눈에는 빛과 물결, 바람과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켜 일렁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보는 이의 눈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부딪친다.

시인은 보고 또 본 끝에 서로, 함께 보게 되는 또 다른 경이를 마주한다. “이 삶에서 (…) 이미/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났”을지라도, “저녁을 먹고/소파 아래 비스듬히 기대 앉아/(…) 떠드는/그런 게 삶이었”거나 “삶이 아니라고 우긴다” 해도 “삶/이라 적고/지우지 않게 되”는 것(「해피 아워」). 여럿이 함께 같은 것을 들여다보면서도 “우리는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보기를 멈추지 않는 것(「우리들의 유산」).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떤 “지나가는 마음”이 “등이 높아 한번 뒤집어지면 제 힘으로는 다시 뒤집을 수 없”어 뒤척이고 있을 때 “우리는 함께/마음을 밀어 제자리에 놓아준다/마음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우리가 지나간다 지나가고 있다”(「지나가는 마음」). 지나가고 다가오는 것들을 향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우리의 고요하고 범상한 생활이 내비치는 기적을 시인은 가만가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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