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시인의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사진출처=창비]
                               이정록 시인의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사진출처=창비]

어릴 적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계단을 타고 올라간 뒤 미끄러져 내려오는 게 전부이지만 꼭대기를 성채 삼아 함락 작전을 펼치던 미끄럼틀이 있고, 원심력을 이용해 진자운동을 하는 게 전부이지만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두 명의 다리를 꽈배기처럼 꼬아 함께 허공을 달리며 바이킹 놀이를 하던 그네가 있으며, 원숭이처럼 상하좌우로 타고 오르는 게 전부이지만 그 미로 같은 지형을 활용하여 잡기 놀이를 하던 정글짐이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협동심, 공동체 의식 등을 자극하고 길러주기 위해 다채롭게 응용하여 놀 수 있게 만들어진 이 놀이기구들은 여럿이 함께 놀아도 좋지만 혼자 놀아도 좋다. 어쩌면 혼자 놀 수밖에 없는 아이를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일지도.

이처럼 대부분의 놀이기구가 혼자 놀아도 좋고 같이 놀아도 좋은 포용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유독 시소만은 그렇지가 않다. 시소는 각자의 무게에 가해지는 만큼의 중력을 활용하여 양쪽이 사이좋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원리로 움직이기에, 혼자서는 어쩐지 탈 수가 없다. 혼자 시소의 한쪽 끝에 앉았을 때 눈앞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앉지 않아 허공에 떠 있는 다른 한쪽 끝의 빈자리다. 적적함을 달래러 혼자 놀이터에 온 아이가 시소에 앉는다면 괜히 더 외로워지지 않을까. 그런데 이정록 시인의 시집 『그럴 때가 있다』(창비 2022)를 읽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이는 시소의 맞은편 빈자리를 보며 마냥 외로울 수도 있지만, 그곳에 앉지 못한 미지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그를 향한 마음 씀으로 빈자리를 채우는 법을 스스로 터득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이 먼 훗날 시소를 떠나 길 위나 탁자 위에 놓였을 때, 지금 여기의 평탄함과 안락을 허락받지 못한 다른 어딘가의 누군가를 넌지시 가늠하는 저울이 될 수 있노라고 시인은 말한다. “매끄러운 길인데/핸들이 덜컹할 때”는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이고,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저 혼자 떨릴 때”는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젖은 눈망울이/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그럴 때가 있다」)

행복과 평화의 총량 법칙이라도 있어서 이곳이 평온한 만큼 지구 반대편은 불행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앉은 자리가 편치는 않을 것이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누군가가 무언가를 지나치게 많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아무것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법. 시소를 지배하는 단순한 물리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살벌한 논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이는 키가 자랄 적마다 조금씩 터득하고 또 억지로 삼켜야 할 테다. 그리하여 놀이터에서 놀기에는 멋쩍은 나이에 이른 아이가 어느 날 그 옆을 지나다가 “아무도 없는데/한쪽으로 기울어져” 정물처럼 놓여 있는 시소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 앉아 있”거나 “마지막까지 앉았다 떠난 침묵”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게 아닐까 상상한 끝에, 한쪽으로 기우뚱한 시소의 기울기란 “무참하게 잠기고/추락한 것들의 기울기”(「시소」)일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을 굴리며 마른 침을 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아이를 그런 끔찍한 죄책감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지는 않는다. 시인은 아이를 넉넉하게 다독이며,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느라 그만큼 자신을 괴롭히라고 시소가 있는 게 아니라고, 다른 누군가에게 내 몫을 덜어주거나 그의 몫을 대신 져주며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하지 않도록 영원한 균형 잡기 놀이를 하라고 시소가 있는 거라고, 엉뚱하지만 참신하여 또 수긍이 가는 그런 위로를 던진다. 어른의 시소 놀이란 “누군가의 상처에/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불어 넣”어 그의 “가슴속 피멍과 녹물”을 “탕약”으로 녹여내는 것이기도 하고(「따뜻해질 때까지」), “연통 속이 검어질수록 세상은 따뜻해”지듯이 나의 속을 검게 태우는 만큼 너의 겉을 희고 말갛게 되돌리는 것이기도 하며(「성악설」), “떠날 때 손을 흔드는 건/흐릿해지는 기억을 잘 닦겠다는” 것이자 “언제까지나 사랑을 흔들어 깨우겠다는” 것임을 깨우치는 것이기도 하다고(「배웅의 양식」).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부질없어 보이는 시소 놀이를 계속하다가 어느 날 기적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점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러니까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하나둘일 때는 나만 응달 얼음판이고 억울하다만 살다보면 다들 걱정거리가 꾸러미로 바지게 짐짝으로 게서 거기”인 상태에 이른다면, “슬픔도 괴로움도 다 무더기로 피는 꽃”이 되어 그 무게가 어딘가로 증발해버리고 “굴러다니는 깡통도 다 개성적으로 빛나”는(「그렇고 그려」), 촌스럽지만 퍽 평등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은 그런 세계에 이미 다녀오기라도 한 양 “부푸는 무지개를/슬그머니 끌어 내리고/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손난로를 선물”하라고,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손끝만 내밀”라고(「감정의 평균」) 무심하게 툭, 조언해준다. 그것을 세계와 타인을 향한 우리 마음의 균형추로 삼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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