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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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는 감독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머니 강정희씨는 젊은 시절 제주 4.3 사건의 현장에서 도망쳐 일본에 정착한 뒤, 분단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으로 이적하며 당에 의해 아들을 희생당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어머니의 복잡한 삶의 행적을 따라 덩달아 상처받아야 했던 감독은 영화라는 매개를 빌려 그런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4.3 사건에 대한 고통으로 남한을 버리고 북한을 택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사랑하기도 하기에, 감독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이해하고자 애쓴다.

이해하는 것이 상대가 처한 자리에 서 보는 것(verstehen)이자 상대가 놓여나지 못하는 아픔을 함께 취하는 것(comprendre)이라면, 누군가를 이해하기란 곧 누군가를 사랑하기와 매한가지일 테다. 진은영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2022)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이해하기 위한 멀고도 아득한 시적 도정으로 읽힌다.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는 만큼 사랑의 폭 또한 늘어나는 것이라면 진은영의 시는 넓히고 늘리는 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다. 시인은 외따로 떨어진 이들이 함께 설 자리를 마련해놓고 그들 뒤로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시의 본령임을 주지시킨다.

“그러니까 시는/시여 네가 좋다/너와 함께 있으면/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그러니까 시는」). 시라는 존재는 내가 나를 안을 수 있게 한 뒤에 홀연히 사라진다. 마술사의 모자에서 분홍 토끼가 튀어나오고 싸우는 이의 모자에 땀의 완두콩이, 죽은 이의 모자에 깨진 심장이 남는 반면 시인의 모자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시는 그저 “두 글자가 모자라는 말”이어서 시인은 “모자라는 것을 쓰고 온종일 걸어 다”닐 뿐이다(「모자」). 모자람으로써 채워주고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이 “나선으로 날아오르는 시의 천사”(「시인 만세」)는 언제 있었나 싶게 흩어지는 빛, 소리, 혹은 향기와 같은 것.

시의 천사가 내려앉은 뒤 “사라지고 꺼지는 것들로/잠시 환해지는 관념의 모서리”(「방을 위한 엘레지」)에 사랑의 신이 당도한다. 그러나 이 신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온다/두 손을 문지르며 사라질 때까지 경배하지만/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고 신은 비누 거품처럼 잠시 임재했다가 녹아 없어진다(「파울 클레의 관찰 일기」). 시인은 사랑이란 금세 씻겨나갈 비누 거품을 만들려 매번 부지런히 손을 비비는 행위와 같다고 설파한다. 부지런하고 또 부질없는 그 행위가 묵직한 고형의 비누를 가볍고 투명한 거품으로 녹인 끝에 마침내 물과 함께 흘려보낸다. 두 손 사이 고집스레 자리하던 물질을 승화시켜 기적처럼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빈 공간이 이해의 자리를 마련하고 사랑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는, 공중화장실 비누같은 얼굴을 한 신의 논리는 퍽 잔인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려 자신의 마음에 텅 빔을 들여야 하는 가혹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빈 공간이 오래 머무르는 만큼 사랑 또한 오래 지속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그날 이후」)하다는 아이를 사랑하느라 마음의 구멍이 닳다 못해 심연으로 파고드는 기막힌 조화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랑은 이 심연의 깊이 또한 초월한다. “너와 나의 먼 거리를/아빠가 두 장의 젖은 종이처럼 딱 붙이신다/멈추지 않는 눈물로”. 어떤 사랑은 너무나 간곡해서 “감정의 원근법”을 뛰어넘어 빈 곳을 채우고 먼 것을 끌어당긴다. 시가 사랑의 신을 모사하여 넓히고 늘린 자리를 어떤 사랑은 좁히고 줄인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은유의 살갗”(「아빠」)으로 어떤 사랑은 시를 초과한다. 어떤 사랑은 시가 도달할 수 없는 곳, 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도록 맨살로 세계를 견디고 있다. 시는, 혹은 신은 그곳을 어설프게 흉내내어 비슷한 자리를 어물어물 마련해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히 닿을 수 없는 그곳을 흉내낸 시를 빌어 누군가를 이해해보려 애쓸 뿐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두 개의 전혀 다른 심연이 그 아득함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닿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게 서로 사랑하기 어려운 달이 올해도 어김없이 오고 있다. 4월이, 그리고 5월이. 그럼에도 너를 오래 사랑해보려, 누군가는 오늘도 비누를 쥔 손을 파리처럼 싹싹 비벼대고 있다. 헛헛한 거품에 저미는 마음을 긍정하고 또 긍정하며. 영화에서 강정희씨는 그렇게 싫다던 일본인을 사위로 맞아들이며 삼계탕을 끓였더랬다. 닭을 씻고 손질하고 찹쌀과 마늘을 채워 넣어 거품을 걷어가며 오래오래 끓이는, 수고롭고도 상서로운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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