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br>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누구나 농담을 한다. 진지한 사람은 진지함이 언제나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려 농담을 하고, 슬픈 사람은 슬픔을 견딜만한 벗으로 삼아보려 농담을 하고, 기쁜 사람은 흘러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함께 나누기 위해 농담을 하고, 좌절한 사람은 좌절의 폐허에서 희망을 뒤적거려볼 힘을 추스르기 위해 농담을 한다. 농담에는 무언가를 다른 성질로 새로이 변모시키는 연금술과 같은 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지은의 시집 『때때로 캥거루』(문학과지성사 2021)는 기분을 바꾸고 상황을 뒤집는 온갖 비법들이 담겨 있는 유쾌한 흑마술서 같기도 하고, 집집마다 책장 한 켠을 차지한 채 키득키득 웃길 날만을 고대하고 있는 유머집 같기도 하다.

시가 농담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가 별것 아닌 것도 별것으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기분은 상점에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될 수 있다. “기분은 언제나 다른 기분과 조금씩 섞여 있”어서 “안개+레몬=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고 “냉장고+인형+시체=심야 택시를 타고 가는 기분”과 같다(「기분 상점」)  “알로하, 쥬템므, 구텐탁”이 울려퍼지는 낯선 땅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이곳의 나쁜 버릇도/저곳에선 좋은 습관이 될 수 있다”(「대체」). 심지어 “어제 쓴 문장을 농담의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실패한 문장이 많아질수록/농담이 늘었다”(「신문지」)고 시인은 반색한다.

실패에 대한 낙관이야말로 농담의 가장 좋은 원료가 된다. “노래는 하면 할수록 잘 부르게 되는데/살면 살수록 잘 살아지지 않”는 불변의 이치를 조금만 비틀어보면 “실패는 반복할 수 있지만 늘 새롭다고/그래서 신비롭다고” 낙관할 수 있게 된다(「러시아 형」).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은 실패를 낙관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농담을 능숙하게 해내는 힘을 기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임지은의 시는 늘 새롭고 신비롭게 실패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시에는 세 개의 실수가 숨어 있”고 “그 사실을 완벽하게 잊기 위해 외출”했으며 “이 시의 가장 큰 실수는/실수를 넣는 것을 깜빡하고/말았다는 실수”(「가죽 바지를 입은 시」)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패이기도 실수이기도 한 농담에 왜 그리 익숙해져야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시인은 바로 삶이야말로 거대한 농담과 같기 때문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어떤 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오가며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지언정 “신은 매일매일 태어나고 매일매일 죽”기에 인간의 “그런 기분을 알 리 없”으므로 단지 “고개를 들어/케이크에 꽂힌 그를 촛불처럼 불어 껐다”(「하필의 법칙」). 너무나 신랄하고 가혹하기에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고야 마는 삶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버티고 서 있노라면 농담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악령은 사실 안녕의 잘못된 발음”이라고, “초콜릿이 묻은 손으로 무려 인생을 56페이지나 넘겼”(「내 앞에 초콜릿 껍질」)다고 허허실실 말할 수 있으려면 농담은 필수적이다.

농담이 삶을 초과할 때, 농담이라는 거푸집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농담으로 담아낼 만큼 몸집을 키웠을 때, 우리는 비탄의 껍질 속에서 비로소 시를 건져올릴 수 있다. “중요한 순간 탁, 깨져야 하니까” “좋은 소설가는 날달걀”이라고, “문워크를 할 때조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춤추는 사람은 낙관주의자”(「유머 있는 라이터」)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비로소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 보기에 시인이 되는 것, 그러니까 삶을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우울과 슬픔, 고통과 좌절을 재료로 한 줌의 빛나는 농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시인이기에. 주사위처럼 “인생도 여섯 개의 면을 가지고 있”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바로 웃긴 면”이기에(「인생의 밝은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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