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파란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김영사 2022)에서 고유의 역사와 주체성을 간직한 타자로서의 사물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에 가까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괘종시계나 가죽구두 따위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정보에 연결되도록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객체들이다. 그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고,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매끄럽고 ‘스마트’하게 처분 가능한 정보로 모든 것을 환원한다. 세계가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운 착각은 역설적으로 세계를 붕괴시킨다. 세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빈곤한 줄 모른 채 빈곤하다.

세계에 대한 감각, 즉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저항을 갖춘 타자들에 둘러싸여 그 압력을 견디며 공존하는 감각은 이제 인위적인 훈련을 통해 터득할 수밖에 없게 된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훈련을 권하는 ‘상품’은 전무할 뿐 아니라 거의 아무도 그런 식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그 와중에 시집이 아무에게나 쉬이 낱장이 넘겨지기를 허락하지 않으며 고고하게 입을 다문, 흡사 최후의 사물과 같이 잔존하는 현실은 소비 자본주의와 사물 인터넷 시대에 그나마 남은 한 줌의 축복일까. 너무 많은 시인들의 너무 많은 시집들이 화려한 표지를 뽐내며 굳게 닫혀 있는 모습이 대형 마트의 진열대마냥 그로테스크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끊임없이 팔려 나가는 ‘너무 많은’ 매끄러운 상품들을 대하는 우리의 무감함이 보여주듯이 너무 많음은 시대의 문법이 되었지만 정작 이를 사유하려는 노력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호성의 시집 『적의의 정서』(파란 2022)는 그야말로 사물의 면모를 갖춘 언어들이 숨막히게 과밀한 생태를 이루고 있어 각별하게 다가온다. 빽빽하고 촘촘한 문장들을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가다보면 얼핏 우리 일상의 리듬과 익숙한 속도감이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가시 돋친 적의를 숨기지 않은 채 포진해 있는 단어들의 저항에 거듭 부딪치다보면 어느샌가 몸 곳곳에 생겨난 상처에 몸서리치게 된다.

“너와 나는 쾌락의 책이며 허약한 활자이다 급히 갈겨쓴 이 전염병을 읽는다면 나의 적의를 조금은 이해할까? 펜은 서울 남쪽으로 향하고 퇴고가 계속되는 가운데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나는 망망대해를 지배한다는 우월감을 느낀다”(「환태평양 조산대」). 시인의 문장은 호전적인 단어들이 미처 뭉쳐지기도 전에 공중에 흩어지는 격렬한 가속도를 조성함으로써 세계가 붕괴하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세계 없음의 감각을 통해서만 세계는 비로소 실감된다. “위생과 정복의 감각을 분간하기는 녹록지 않”은 가운데 “너의 어깨 너머로 200인치 스크린 저 멀리 빙하가 사라지는 곳에서 검은 함대가 몰려”(「질긴 숨」)오는 것과 같은 아득한 실감 말이다.

빠르게 달리는 버스의 안팎을 포착하고 있는 시 「가속도」에서 버스는 “공중에는 혀를, 땅바닥에는 꼬리와 함께 나타”나는 분열된 모습이며 “사람들은 창밖으로 휴지를 던지고 입을 벌리”는가 하면 가로등들은 “더 멀리 달려가기 위해 서로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펴진 적 없는 척추처럼 부끄럽게 꺼낸 말들은 운전대 속에 숨어 보살핌 받으며 그 회전 속에서 거의 범람할 것처럼 보인다”. 보들레르가 19세기 대도시 파리의 이미지를 펜 끝으로 낚아챘듯이 김호성 시인은 속도의 인플레 속에 빨려들어가는 와중에도 그러한 소멸의 속도에 저항하는 이미지와 언어의 파편들을 한사코 움켜쥐려 한다.

그러니 시에 부려진 것들은 온전하게 종합되지 않을뿐더러 종합을 목적하지도 않는다. “눈알이 으깨지도록 그 사람을 바라”보고 “플라스틱으로 변한 각막을 따” 내고 “허공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걸어”가는(「상쾌한 공기」), 그야말로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모두 파멸시키려는 타나토스적인 충동으로 시는 가득 차 있다. 아무리 주먹을 꽉 쥐어도 가느다란 눈매마냥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벌어지는 틈새를 통해 시는 모든 것을 삼키고 또 토해내기를 반복한다(「악력」). 시는 단지 “손바닥에 바글거리는 글자들을 전부 바쳐 숨을 토”할 뿐이고(「문밖에서」) “갑작스런 담배 연기처럼 어느 것에도 섞이지 않”으려 할 따름이다(「중력」).

눈앞의 흰 종이에 정적으로 인쇄되어 있는 활자들이 정작 단 한 구절도 이해되지도 않겠다는 듯 아우성치는 광경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는 시의 적대감을 독자들에게 강권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거부와 저항, 체념과 포기의 어색한 교환 속에서만 근원부터 소실된 세계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서비스로 제공받을 수 없고 누구도 상품으로 소비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적의의 한복판에서만 세계가 비로소 감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호성의 시집은 한 권의 폐허이자 한 권의 세계로서 여느 책장 속에 오래도록 잠복해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