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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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은 색을 일컬어 ‘우리의 뇌와 우주가 만나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색은 사물의 표면에 닿는 빛의 파장에 따라 그 빛깔을 달리하며 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된다. 그러니 빛과 사물이 존재하는 우주와 이를 감각하는 우리의 뇌가 색을 매개로 만난다는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색이 하나의 ‘장소’라는 표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색이 단순히 물체의 성질이나 감각기관에 남는 자극이 아니라 하나의 장소라면, 그곳은 사물의 표면, 빛의 한가운데, 우리의 마음속 중 정확히 어느 곳에 위치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색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에 대해 우리가 근원적으로 갖는 매혹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색은 마음이 눈을 통해 밖으로 나와 사물들 사이를 거닐 때 남겨진 발자국과 같은 것이리라. 안차애의 시집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천년의시작 2022)는 그런 발자국들이 하나둘 모여 생긴 좁고 구불구불한 흙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길은 세계와 마음을 연결해주고 있는바, 필경 색이란 하나의 장소이되 고여 있거나 닫혀 있지 않고 사방을 향해 부단히 열려 있는 셈이다.

색을 매개로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나의 안과 밖을 보다 선명히 구별하게 해준다. “당신의 안과 나의 바깥은 한 점 접점接點도 없이 몇 생의 어스름을 끌고” 가기도 한다. “나의 웃음은 아직 당신에게 닿지 못”하고 “당신의 고요는 아직 질량이 되지 못”한 이 어긋남의 평형상태는 무채색으로 가득 차 있다(「차도르」). 안과 밖에 대한 인식은 “나의 내부는 횡단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선언적 명제를 떠오르게도 한다. “미농지보다 얇게 피는 것/유금색으로 번들거리는 것/어슬렁어슬렁 시간을 가로지르는 것들”로부터 “나 아닌 것들이 막무가내 나를 끌어당기듯/너 아닌 것들이 자꾸 너를 읽어 내”는 반목의 정서를 읽어내기도 한다(「중력의 내부」).

색은 세계를 감각하는 여러 방식을 시각으로 환원하는 마술적 원천이기도 하다. “메스칼린이라는 마약을 복용하면 바이올린 소리가 나는 공간을 푸른색이 넘친다고 느낀다”는 시인의 전언에는 푸른색의 소리로 넘실대는 공간을 직접 감각하고픈 달뜬 열망이 묻어난다(「푸른 몸」). 나무의 초록과 바다의 초록을 맞닿게 하는 공간적 상상력은 나뭇잎으로부터 초록 물고기들을, 뿌리로부터 파도의 일렁임을 불러낸다. 육지와 바다의 거리감을 선뜻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바다에서 초록까지의 거리”가 “한낮의 궤도 속에 있”기 때문이다(「나무의 바다」). 나무와 바다의 초록이 한낮의 가시광선을 타고 아득한 물리적 거리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색은 단순히 우리를 세계와 만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와 우리가 만나는 방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변모시키는 셈이다. 나를 구성하는 감각에서 나와 타자가 관계 맺는 감각까지, 비시각적인 지각체계를 시각으로 환원하는 감각에서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는 감각에 이르기까지, 색이 우리의 감각을 비현실적으로 빚어내는 스펙트럼은 그것이 빛의 굴절에 따라 무한히 달리 드러내는 빛깔의 수만큼이나 한계가 없다. 시인은 이러한 색의 심원한 속성에 천착함으로써 우리와 세계의 깊은 속내에 닿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색이나 사물에서 파랑을 찾자/파랑에만 집중해서 가장 안쪽 파랑을 찾자/파랑이 쏟아내는 물줄기로 중심의 심중心中까지 온통 적시자”는 호기로운 청유의 문장들은 “니체와 헤세의 첫 문장 사이로 걸어 나오는 파랑의 발자국”을 뒤따라 밟아보고 “첫아이에게 첫 젖을 물리던 날의 푸른 전율”을 온몸으로 받아낸 이만이 허심하게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아무튼 파랑」).

그러나 색이라는 이 존재론적 교량에도 지름길이 있는데, 모든 색을 남김없이 뺀 하얀색과 모든 색을 다 더한 검은색이 그것이다. 갖은 다채로움을 걷어내어 아마도 빛의 굴절도가 가장 낮을 하얀색은 시인에게 “고비의 밤을 밝”히는 “어미의 젖빛”과도 같다. “갓 태어난 아기 낙타”는 “꺼질 듯 꺼질 듯 살아나는 숨결처럼/흰빛 한 채”가 되어 “네 다리로 서야 젖빛에 닿을 수 있다”(「젖빛이 운다」). 그런가 하면 모든 색을 다 흡수해버려 빛마저도 삼켜버릴 검은색은 “제 꼬리의 검정을 뱅뱅” 맴돌며 졸아들어 “어둠의 어둠이 되고 있”는 “저녁보다 검은, 개”의 눈빛 속에 잠겨 있다(「개, 너머」). 혹은 “검은빛을 지키는 사제처럼 엄숙”하게 “젖은 풀밭에 두 발로 서 있는 고양이”의 발치에 고여 있다(「묘시卯時」).

이처럼 색을 고루 사유하는 시인을 따라 색이 현상하고 감각되기까지의 마술적인 여정에 동참하다 보면, 시인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고유한 색의 파동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의 표면이나 빛의 파장 없이도 온전히 마음에서 마음으로 감각되는 투명한 빛깔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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