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시인의 일요일]
[사진출처=시인의 일요일]

자연은 인간 사회의 원료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땅이 파헤쳐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자원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초의 자연환경과는 무관하게 효율성만을 고려한 농장과 지대가 대규모로 개간된다. 자원은 분자와 원자 단위까지 낱낱이 활용되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버려질 쓰레기가 지구 이편에서는 상품으로 소비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연을 가공하여 이루어진 세계를 자연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는 태초의 자연을 희구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남획되는 자연의 신음에 귀 기울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자연은 만사의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길 뿐 고통으로 신음하지도, 우리에게 인자한 미소를 건네지도 않는다. 

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인간이 관여하는 순간 자연은 인공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을 인공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와 삶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임의적인가를 상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예강의 세 번째 시집 『가설정원』(시인의일요일 2023)은 인간 존재의 임의성에 대한 감각을 능숙하게 자연에 투사해낸다. ‘정원’은 인공 자연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만 꾸준히 손질하지 않으면 금세 무정형의 자비 없는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정원을 가꾸기란 정원을 매 순간 새로이 가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잡초를 뽑고 물을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는 행위는 도로를 내고 콘크리트를 붓고 건물을 올리는 행위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시인 또한 표제작인 「가설정원」에서 도시를 하나의 가설정원으로 정의하고 있다. “딱딱하고/싱싱한 꽃이 피”는 도시는 “망망 초원이고/게르이고/검고 작은 씨앗”이다. 도시는 “향기를 가설하고/가을을 가설하고/가설한 행복을 심”는다. 꽃이 피고 지듯이 허물어지고 복구되기를 반복하는 도시의 생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의 싱싱함에 견줄 만하다. 도심의 산책자들은 “정원 관람객”이 되어 “시들지 않는 꽃”을 관람하며 잠들지 않는 행복을 소비한다.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공간에서 변치 않는 관념들을 발견하고 감각해내는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인위적인 삶을 견뎌내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능력 말이다.

시인은 인공물을 자연으로 인식하는 만큼이나 자연 또한 인공물로 정초하기도 한다. 나팔꽃 덩굴이 수직으로 타고 올라가며, 바람이 세차게 부는 “흔들리는 정원에서 흔들리는 기둥을 세운다”. 화자의 언니는 건물을 철거하듯이 정원의 “사나운 그늘도 부수고 뜯어낼 것이다”(「언니」). 그런가 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로 지은 집, “잎사귀로 가려지는” 간신한 새집은 시인의 눈에 “벼랑이고/국경이겠구나” 싶다(「새들이 짓는 집」). 바람의 속도로 지어지고 흔들린 끝에 이내 스러지는 새집은 도심의 가설건물 못지않게 임의적이고 한시적이다.

냉혹한 도시를 간신히 살아내는 인간의 삶 또한 새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걸까. “3개월 수습사원인 K”는 “잘린 천 조각들이 수생식물의 잎”처럼 바닥을 떠다니며 “날개가 될지도 모르는/추락이 시작할지도 모르는” 옷으로 거듭나는 것을 노상 지켜본다. 그의 “파산했고 혼밥하는 원룸 창가”에는 “초록 화분이 자란다”. 심지어 “바깥은 춥고 안보다 따스하다”. 안보다 따스한 바깥을 피한 남루한 원룸 창가에서 자라나는 초록 화분은 흡사 인공물과도 같다. 화분 속 식물이 좁게 뿌리를 내리듯이 원룸에 몸을 누인 재단사도 “다리는 얼굴에 붙어서 작아지고/두 팔도 얼굴에 붙어 작아진다”(「수습사원 재단사 K」).

이처럼 시인은 인공의 자연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향한 시선을 확장한다. 인간의 눈에 포착된, 인간의 곁에 자리한 자연은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눈을 통해 “한 그루의 라임나무는 잎사귀부터 신을 보여 준다”. 시인이 보기에 “꽃은 꼭 거짓말 같다 (…)/없었던 자리가 환한 것도/있었던 자리가 감쪽같은 것도”(「라임나무를 심다―꿈」).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과 감각을 풍부하게 하는 힘이 있다. 고대 중동사람들이 갖고 있었다는 “흐르는 눈물을 담아 두는 병”(「눈물」)처럼 자연은 인간이 그저 흘려보내고 말 것을 보전하는 원천과도 같다. 그렇기에 시인은 인간의 삶이 자연과 교차하는 지점들을 채집하여 시의 형태로 담아두려 한다. 시인은 “햇빛 드는 집이 건축”되기를, “12개의 채광창이 생화처럼 피”어나기를 희구하는 마음을 오래 들여다본다. “미완인 채 우리를 찾”는 삶(「채광창」)을 무심한 자연처럼 견뎌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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