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파란]
[사진출처=파란]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한길사 2016)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분석한 비평집이다. 호퍼의 그림이 주로 대도시의 고독한 익명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곤 하는 데 반해 그는 이 책에서 그림 속의 기하학에 주목한다. 건물이나 풍경의 선이 화면을 어떻게 구획하고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빛이 어디서부터 오고 있으며 인물의 시선은 무엇을 쫓고 있는지. 화면 속에 정지한 사람과 사물의 방향성에 집중함으로써 스트랜드는 사각의 평면에 굳어 있는 그림을 안으로 깊이 파고 밖으로 확장시킨다. 그의 비평을 통해 호퍼의 그림은 고독의 한순간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으로부터 도래할 무엇을 향하는 흐름 속에 잠겨 있는 것이 된다.

그의 비평이 남다른 안목으로 사랑받는 것은 어쩌면 그가 비평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술을 공부하고 미술에 관한 다수의 책을 썼지만 그는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까닭은 시인이야말로 사각의 평면에 굳어 있는 문자들로부터 그 내부의 심연과 그 외부의 세계를 굴착하고 확장하는 일에 탁월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해선의 시집 『나의 해적』(파란 2023)은 다채로운 위도와 경도를 품고 있는 평면들의 다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시는 잔잔한 바다 어딘가를 끊임없이 표류하고 있을 해적의 흔들리는 좌표를 끊임없이 가리키는 행위와도 같다. 문장이 진행될수록 정태적 세계 속의 고요한 활력이 깨어나며 저마다의 존재 속에 웅크리고 있는 무엇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것이 “나의 왼쪽 가슴속에 살고 있는 너일까 내 뒤를 밟고 있는 익명의 얼굴일까”(「나의 해적」) 살피며 존재 안에 살고 있는 해적을 발견하는 것이 시의 사명이라는 듯이, 시는 뱃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이리저리 항해한다.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려는 이 고단한 행위는 흡사 “모래알과 물거품 사이를 밟”는 것과 같다. “오른쪽을 밟으면 안개에 싸여 있는 바닷속으로 끌려갈 것 같고 왼쪽을 밟으면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던져질 것 같”은, “순간 뜨겁다 차가워”지는 그 경계선을 시인은 부러 밟으려 한다(「샌드위치」).

「잠깐 볼 수 있는」은 제목 그대로 찰나에 시신경에 닿았다 사라지는, 밤이 도래하는 감각을 연어에 비유하고 있다. “밤이 온다 연어처럼 구름을 몰고 온다 어둠에 덮인 버스 정류장으로 마지막 물살을 걷어차고 연어처럼 올라온다”. 이 밤은 “숨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밤은 그저 어두운 상태나 정적인 풍경에 불과한 게 아니라 낚아챌 수 있을 듯 팔딱이며 거친 물살을 “뚫고 올라오는” 생물과 같은 것이 된다. 「새우」는 촛불에 녹아 떨어지는 촛농을 새우에 비유한다. “새우가 뛴다 촛농을 떨어뜨리며 수백 마리 새우가 뛴다”. 촛불의 열기에 눅눅해졌지만 금세 굳어버릴 이 새우는 “굽은 등을 밀어 올리며 폭풍을 폭동이라고 중얼거리며, 촛불 속에서 껍질이 살을 붙잡고 뛴다”.

이처럼 김해선의 시에서 모든 존재는 그 속에 해적을 품고 있는 바다와 같다. 시인은 그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복원하고 싶어 사라지는 것을 돕고 싶어”(「사라지는 피부 말을 배우는 피부」) 노를 젓듯 시를 쓴다. 시를 통해 시인은 어쩌면 단 한 번도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고 소멸할지도 모를 숱한 존재들을 안팎으로 조명하고 그들 고유의 존재성, 즉 해적을 흔들어 깨움으로써 그들 모두를 깊고 거대한 바다로 탈바꿈시킨다. 그의 시를 통해서라면 돌멩이도, 우산도, 발자국도 모두 바다가 된다. 우리가 길을 걷고 음식을 먹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지나치는 모든 행위는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심해에 뛰어드는 것과 같게 된다. 

멈춰 있는 모든 사소한 존재들을 입체적, 다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결국 멈춰 서서 그들을 오래 들여다보는 고행이 요구된다. 그림 앞에 한참을 멈춰 서 있는 관람객처럼 시인은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만물 앞에 매 순간 멈춰서서 한참을 머물고 또 서성일 것이다. 그렇게 “들리지 않는 귀를 열고 읽지 못한 책을 읽어 가는 새벽”이 쌓이고 쌓여서, “오래된 벽에 기대어 희미한 꿈속으로 들락거리는 일”(「다뉴세문경」)이 물릴대로 물려서 비로소 문장이 되고 시가 될 것이다. 흐린 거울을 오래 공들여 닦듯이 현실의 덮개를 닦아내며 “어디까지 내려가야 마지막을 만날 수 있는지”(「지나치게 지나치지 않은 방식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태도가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된 끝에 시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한 편 한 편의 시를 오래, 자주 들여다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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