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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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출신 작가 에밀 시오랑은 어느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플루트를 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이 곡조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죽음 직전을 상상하는 것은 어딘지 고약하게 여겨지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그 순간 플루트를 연주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고 전하는 이야기 앞에서라면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다. 나아가 그가 하늘을 바라보거나 새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것이며, 인간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 그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또 하나 알고자 애쓰는 모습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김소형의 시집 『좋은 곳에 갈 거예요』(아침달 2020)를 읽다 보면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쉽게 헤아릴 수 없음을 확인받고 또 위로받게 된다.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하면서도 인간을 향한 애정을 거두지 못하는 모순된 마음만이 우리를 가장 인간이게 한다는 사실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을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루는 법을 시인은 가르쳐준다. “잠시 죽을게 말하는 사람”과 “금방 올 거지 말하는 사람”이 공존했다가 멀어지는 자리를,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한 사람은 벤치에 앉아 듣는” 풍경 속에 “쏟아지고 있는/사람의 목소리”(「그 음악 좋았지」)를 종요롭게 여기는 법을 알려준다.

인간을 향한 시인의 무한한 애정은 ‘대화’를 중요시하는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충만하면 충만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엮이고 또 스쳐 지나가는 대화들이 시의 형태로 간직된다. 가령 책과 텔레비전, 워크맨과 삐삐와 같은 사물에 대한 경험이 서로 다른 사람들 간에 나누는 대화는 “사물과 사물을 쌓으며/움직인다”. “서로 어떤 시간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와중에 “처음의 질문도 잊었는데/그는 나의 말을 오래 기억”(「삐삐」)하는 놀라운 순간도 빠지지 않는다. 혹은 “환생하겠다는 사람과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는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나누는 대화는 이러하다.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이상하다.//인간을 사랑해?//다시 태어난다니, 다시 사랑한다니.”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서도 화자는 “인간의 마음으로 앉아서 풍경을 본다. 아름다운 걸 본 것도 같다.”(「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인간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때 인간이 떠나간 자리도 인간의 형상으로 남는 걸까. 수많은 죽은 이들을 품고 있는 저수지 앞에서는 “물은 사람의 형상을 잊지 않고 떠다닌”다던 이야기가, 익사하거나 뛰어든 사람들의 일부를 우리가 마실 때 “수많은 입술이 물고기 떼처럼 떠오른다”던 이야기가 부표처럼 떠오른다(「죽으려고 한 날에는 죽지 않고…」).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안부를 묻다가/그 사람의 장례식 소식을 듣는 사람”이 “말도 없이/언제 돌아가셨대?” 되묻는 모습 앞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친절하게 알리고 떠나는 것이 예의인가 하고 마음으로 반문한다(「미안하지도 않나」). 시인은 그러한 마음을 통해 떠나간 인간일지언정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간구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인간으로서, 오직 인간이기에 갖출 수 있는 품위를 간직하고 돌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지난날 신의 품 안에서라면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었을 그것이 “왜 내게는 없는 것이냐고” 묻는 너에게, “품위가 우리 곁에서/잠시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려는/나에게/너는 그것을 찾게 되면/알려달라고 말했다//그것은 오래전에/잃어버린 것이라고”(「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잃어버린 그것을 찾기 위해 사는 듯한 세월의 어느 여름에는 “죽어서도 가끔은 시원한 게 먹고 싶을까” 궁금해하며 “우리의 이름”처럼 “차갑고 아무것도 없는 오이”를 냉면에서 건져내면서, “물만두를 힘겹게 헤치면서/열심히 잊는다. 다음의 죽음을.”(「구빈원」) 죽음을 생각하거나 죽음을 잊기 위한 것이라면 냉면을 건져 먹는 사소한 순간에도 인간은 충분히 품위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한겨울의 무기력을 털어내고 오늘은 꼭 글을 써야지 하고 다짐한 날의 아침에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 남은 힘을 다 털어 넣어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누군가의 ‘사회적 죽음’ 앞에 얼마만큼의 책임을 느껴야 하고 또 얼마만큼 아파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짓게 된다. 누군가를 기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던 이가 조롱과 수치가 담긴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을 누구나 조금씩은 히히덕거리며 지켜보지 않았는지, 우리의 작은 즐거움이 그에게 얼마만큼의 아픔으로 변모하였는지 가늠해보게 된다. 우리 곁에서 잠시 사라진 품위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내고 또 거두어들일 수 있을지 헤아리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자문하며 마른세수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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