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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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소설 『메테오르』에서 “행복의 힘은 ‘주어진 것’과 ‘이룩한 것’이 적절한 비율을 지녀야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적 이미지의 글쓰기로 유명한 이 작가의 행복론은 그의 명성과 크게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삶과 죽음, 하늘과 땅, 낮과 밤, 생물과 무생물과 같이 이질적인 양극단의 조화가 세상을 이끌어가듯이, 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생의 전면과 이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주어진 것에 비해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이룩하는 것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주어진 것에 대한 판단도, 이룩한 것에 대한 평가도 고정불변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불행도 행복도 어디에서 도래하는 것인지 섣불리 말할 수 없게 된다.

김희준 시인의 첫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에 대해서도 같은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시집을 통해 이룩한 것, 혹은 이루고자 한 것이 그에게 주어진 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 이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그의 신화적 상상력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인류의 전생과 후생을 접목하여 태어났던 것과 도래할 것의 균형점 속에서 신인류를 조형해내고자 하는 그의 시적 노력은 설익은 것과 과도하게 익은 것을 접붙인 끝에 기묘하고 신비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형상은 보기에 따라 모자랄 수도, 넘쳐흐를 수도 있다.

시인이 신화적 형상과 조우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거울이다. “거울의 중간 지점을 꿈”이라 했을 때 “전생이 껍질을 벗는 것은 거울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거울의 안과 밖이 마주하는 것은 전생과 후생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잎사귀의 파장”이 전생을 두드리고 “후생이 성립될 동안” 혼수상태가 이어지는 혼곤함 속에서 시인은 “식물처럼 사는 인간”인 “네펜데스”를 찾아 헤맨다. “거울에 누워 있는 나를 꺼내”는 순간, 즉 거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거울에 맺힌 상과 거울 밖의 대상은 하나로 합쳐진다(「에덴의 호접몽」). 이는 그저 ‘나’ 안에 잠들어 있던 씨앗이 발화하는, 폭력도 살육도 없는 합일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식물적’이다.

거울이 이미지와 현실의 양극단을 접붙여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듯이 태양 또한 세계를 이질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정오의 태양, 여름의 태양은 세상의 한가운데, 계절의 한복판에서 수직으로 작열하며 물을 증발시키고 식물을 태운다. “신열을 앓는 도시와 더위에 희석된 8월/열대야의 단면에선 약속들이 기척 없이 태어나고”(「안녕, 낯선 사람」) 세상은 고요히 끓어오르며 변모한 형질의 낯선 존재들을 맞이한다. “여름이 지나간 방향으로 분실된 천문학이 기록”(「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되며 계절이 거꾸로 돌고 방위가 뒤집히는, 거울의 경계가 찢기고 깨지고 녹아내리는 시간이 도래한다.

그러나 “전생과 진화가 충돌”(「면접의 진화」)하는 국면들을 붙들고 굽이치는 시의 언어는 동일한 상상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슬픔과 외로움을 동반하는 듯하다. 작열하는 태양이 지쳐 꺼져버린 세계에서 태양 대신 빛나는 몸을 갖고 태어난 인류의 다음 세대는 “손을 잡고 원을 돌”다가 하늘로 올라가 돌연 사라진다(「새벽에 관한 몽상」).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 불을 내어준 뒤 고통 속에 스러진 것처럼 시인이 상상하는 신인류는 책장에 자리를 얻지 못한 책, 손을 잡아주고 감정을 이해해줄 ‘아무나’를 찾지 못한 이방인, 궤도를 이탈한 그네처럼 문장 속을 절뚝거린다. 너무 빨리 다가온 미래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는 듯 차갑게 돌아선 현재의 등 뒤를 어슬렁거리며.

몇 년 전 여름 정독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무심코 뽑아 든 이 책이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시집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언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룩하고 떠나려 서두르는 시인의 안타까운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주 전, 구글 뉴스 알고리즘은 불과 몇 년 전 스물에 등단한 어린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잔인할 만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가 생전에 출간한 에세이집 곳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문장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다.

죽음의 무게가 미처 살지 못한 날의 무게만큼 더해지는 것이라면 충분히 살지 못하고 떠난 이들의 죽음은,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언어는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더는 이룩할 수 없게 된 두 시인은 마치 불행한 운명을 나누어 가진 쌍둥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읽는 것은 꼭 불행하지만은 않은, 기쁨과 슬픔이 뒤얽혀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우리의 삶을 두드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들을 행복으로 맞아들이는 일과 같다. 그들의 무거운 언어는 경박하게 증발하거나 싱겁게 희석되기 쉬운 우리의 삶에 작은 무게추가 되어 준다.

죽은 사람의 글은 더 꼼꼼하게 읽힌다. 특히 그의 일생과 관련하여.

내가 죽어도,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내 글을 대충 읽어주면 좋겠다. 다음 작업을 기대해주면 좋겠다.

반대로 내가 살아 있을 땐, 죽은 사람처럼 나를 꼼꼼히 읽어주면 좋겠다. 이 사람이 어째서 죽게 되었는지, 이 사람이 죽기 전에 무엇을 썼는지,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 차도하, 「죽은 사람」,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위즈덤하우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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