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미르’ 유성훈 시집 [사진출처=파란]
‘라디오미르’ 유성훈 시집 [사진출처=파란]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한 잡지에 게재한 에세이에서 오늘날의 거의 모든 일들이 실제로는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여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불쉿 잡』(민음사 202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의 서문에 실려 있기도 한 이 글에서 그는 실제로 유의미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 반면, 대중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선망의 대상으로 소비되기도 하는 전문직, 사무직, 서비스직 등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크게 늘어난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환경미화원이나 지하철 노동자는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지만, 기업 변호사나 로비스트는 쓸모없는 직업이다.

그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무언가를 진정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을 향한 홀대와 무시, 증오가 꾸준히 증가하고 일반적인 여론으로 자리 잡게 된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위의 글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생산직 노동자 없이는 그것을 기반으로 삼는 2차, 3차 산업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러한 일들은 이른바 3D 직종으로 분류되어 대다수가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심지어 그러한 직종에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임시직, 비정규직과 같이 지극히 불안정한 형태로 인력을 수급하여 고용 비용을 절감하는 관행이 우리 사회의 하중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다.

쓸모 있는 일은 쓸모없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은 쓸모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고용주와 사용자에게 유리한 정서를 지배적인 담론으로 유포하는 한편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노동 윤리를 잔존시킴으로써 쓸모없는 일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하는 이 총체적인 기만의 사회에서, 인간의 쓸모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류성훈 시인의 시집 『라디오미르』(파란 2023)는 그러한 기만의 논리에 짓눌린 이들의 고통을 지그시 바라보고 또 견딜만한 것으로 위무하려는 ‘쓸모 있는’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문고리 고치다가/못 대신 손을 찍었는데//쇠 부품 하나 휜 것도/사람을 부르면, 새로 사 끼우면/나의 쓸모는 어디 있나” 푸념하는 이에게 “고통이 고통보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어제부터 아팠던 것이 오늘도 아프고, 심지어 “내일이 어떻게 아플지”도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통증으로부터 오는 물리적 고통과 자신의 쓸모에 대한 물음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이 더해져 고통의 나날을 지속시키고, “전부 나 같은 것들 때문”이라는 자학적인 진단을 스스로 내리게 한다(「고통에 대하여」).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자 자신을 그렇게 직조한 세계를 건너다보는 것이기도 하다.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들마저도 스스로를 쓸모없게 여기게 만드는 이 가치 전도의 기구한 역사는 각자의 지붕 아래에서도 오랜 구습처럼 헛돌고 있다. “비닐하우스 같은 지붕 아래 오래전 죽은 자들의 율법만 강요하는 아버지들과 가만히 있는 게 차라리 돕는 거라고 온 가계를 병풍 세우는 어머니들과 가만히 있는 방법 말고는 아무런 도움을 모르는 늙은 아이들이 전혀 평등하지 않은 시간으로 끌려가는 과정”(「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처럼」) 속에서 가정은 사회의 기만적 논리를 강제로 깨우치고 학습하는 작은 싸움터가 된다. 그곳에서 자라난 아이는 “모두가 힘들다는데 이런 세상에서/글이나 써 미안”하다고 “그런 내가/아들이라서 미안”(「당리동(堂里洞)」)하다고 고개를 조아리게 되고, 그런 아이를 키운 아비는 “가장 큰 오점처럼 당신의 목에 걸린 가계가 매번 시기를 놓치는 것”(「가장 큰 오점처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시인은 이처럼 멀쩡한 이들을 고장 내고 망가뜨리는 세상이란 “미화원들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곳”이고 “청소가 되어야 할 곳은 거리 위가 아니라 거리 자체였을지도”(「산 11-6」) 모른다고 헛헛한 진단을 내린다. “누구는 소파에 앉아 위험의 외주화를 말”하고 “누구는 목장갑을 끼고 현실의 경제학을 말”하는 무용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들어오기도 전에 다 내쫓기는 집들이 끝도 없이 올라가고 (…)//덴 적도 없이 일그러져 있으니/아무도 행정적으로 다치지 않”는 아이러니가 불행처럼 반복된다(「시스템 동바리」). 이미 항상 망가져 있는 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기이한 시스템 속에서 그곳을 지배하는 오류를 선명히 파악하고 피해 다니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현실의 웃긴 점은 현실성뿐”(「삼촌사우루스」)이어서, 시인은 그저 그 웃긴 현실성을 갖고 시를 쓴다. “노력이 뭔지 배운 적도 없는 이들이/노력밖에 남지 않은 이들을 무너뜨리는 게” 일상인 곳에서 “가정용 잠수함을 개발해 라면을 잔뜩 싣고/엄마와 탐험을 가려던 나만 정상이었다는 걸/나는 진즉에 다 알고 있었다”고 호언도 해본다(「지극히 정상이었지만」). 쓸모없는 것이라고 잘못 정의된 존재를 향한 뭇 사람들의 증오마저도 시의 연료가 된다. 비애 섞인 유머일지라도 꾸준히 연마하다 보면 누군가를 속 시원히 웃길지도 모를 일이라고 시인은 가슴 깊이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노력의 쓸모를 읽는 일조차도 쓸모없음으로 오인되기 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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