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기무상><br>
<사진 제공 = 기무상>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화창한 7월의 어느 일요일,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기무상(가명·34)과 가제루상(가명·30)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하늘도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듯 한동안 거세게 몰아치던 장맛비를 거두고 오랜만에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쬈습니다.

새하얀 셔츠와 바지를 맞춰 입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이런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연애 끝에 마침내 부부의 맺을 연을 맺는 기무상·가제루상 커플의 얘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사진 출처 = 기무상 유튜브>

우리가 되기 전, 너와 나

기무상의 첫사랑은 중학교 때 같은 반 여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친구로서 느끼는 감정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레즈비언은 반사회적이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기무상은 ‘나는 레즈비언이 아닐 거야’라며 스스로를 부정했습니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과 가족 몰래 인터넷을 통해 레즈비언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면서도 ‘나는 이런 콘텐츠를 즐겨볼 뿐이지 레즈비언은 아니야’라고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 5살 정도 어린 여대생이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커밍아웃인 거죠. 그 순간 기무상은 ‘아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비로소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기무상과 달리 가제루상은 아주 일찍부터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초등학생 때 이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던 거 같답니다. 이후 친구를 통해 레즈비언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죠. 크게 놀라기는커녕 ‘아, 그렇구나’라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와의 연애를 계기로 사랑에 있어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확고히 했죠. 가제루상은 정체화하기까지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크게 혼란을 겪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체화 이전엔 기무상에게 사랑은 인생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체화 이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자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자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저에게 ‘사랑’은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인생의 동반자’, ‘나와 함께 할 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고, 사랑은 사치라는 말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가장 먼저 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한순간에 풀리듯 난생 처음으로 진짜 내 모습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그제야 사랑이 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됐어요.”

반면 가제루상은 비교적 정체화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해준 첫사랑이 실패로 끝이 나면서 더 이상은 인생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첫사랑을 통해 제 인생에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첫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첫사랑이 끝나고 성인이 된 후에도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죠.”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어떻게 함께 하게 됐을까요?

<사진 출처 = 기무상 유튜브>

“제가 좋아하는 거 아시죠?”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된 건 2015년의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가제루상은 영어 강사인 기무상의 강의를 듣는 학생이었습니다. 서로의 첫인상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처음에는 서로에게 작은 관심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강의 특성상 다른 학생들이 한두달 수강하는 것과 달리 가제루상은 세달 넘게 수업을 들어서인지 조금씩 친분을 쌓으며 밥도 같이 먹고 커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가제루상이 기무상에게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다며 자기네 집에서 맛있는 걸 먹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날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던 도중 가제루상이 갑자기 “제가 좋아하는 거 아시죠”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놀란 마음은 감출 수 없었죠. 가제루상의 고백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본격적인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만남의 사실을 가까운 친구, 지인 등 알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알렸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커밍아웃도 하지 못했죠. 부모님께서 살아온 인생의 나날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실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알리지 않으려는 게 두 사람의 생각입니다.

<사진 출처 = 기무상 유튜브>

닮은 듯 다른 우리

사람 많은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 두 사람의 주된 데이트 장소는 집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각자 할 일을 하거나 박물관이나 과학관, 도서관,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다 보면 손잡고 뽀뽀하고 싶은 건 당연지사.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가제루상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길거리에서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곤 하지만 기무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제지하곤 합니다.

“한국에서 레즈비언 커플이 자유롭게 연애한다는 게 흔한 광경은 아니잖아요. 성소수자에 대해 우리보다는 많이 열렸다고 알고 있는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성소수자 커플을 보면 소리 지르거나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그런 게 걱정되는 거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안 좋은 상황을 걱정해 밖에서는 스킨십을 꺼리는 편이에요.”

기무상은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게 가제루상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필요하면 서로 이야기하면서 맞춰나가고 있어요. 또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엄청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출근 때문에 하루종일 떨어져 있어도 꼭 필요할 때 아니면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아요.”

같은 질문에 가제루상은 최고의 찬사를 남겼습니다.

“기무상은 존재 자체만으로 완벽해요.”

두 사람은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고 서로를 조금씩만 이해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나요.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레즈비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기무상 때문인데요. 유튜브 방송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가제루상이 질투를 하나 봅니다. 가제루상이 꼽은 기무상의 유일한 단점도 ‘인기’였습니다. 사랑을 넘어서 공경하고 아끼는 기무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귀여운 질투겠지요. 소유와 집착에서 비롯된 질투는 아닐까 싶어 수행 차원에서 법률 스님의 유튜브 채널도 구독한다네요. 그런 가제루상의 모습이 기무상의 눈엔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입니다.

<사진 제공 = 기무상>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당신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한 건 꽤 오래됐습니다. 가제루상이 자취를 하는 기무상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함께 살게 됐지요.

영어학원 강사 일을 하는 기무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합니다. 아직 학생인 가제루상은 늦잠 잘 법도 한데 항상 졸린 눈을 비비며 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턴 집안일도 자기 일이라며 가제루상이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좋아하는 케이크와 맥주가 올려진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소소한 일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죠. 두 사람은 이러한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영원히 약속하며 축복 속에 웨딩 마치를 울렸습니다.

두 사람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요.

“동성혼의 법제화나, 동반자를 법적으로 등록하는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아직 정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결혼’은 아직 못하겠죠. 하지만 가제루상이나 저나 결혼은 두 사람 간의 인생에 대한 서로의 약속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희는 이미 함께 살면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미 해오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죠.”

이들 부부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직접 아이를 낳거나 키울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강아지 2마리, 고양이 2마리와 함께 가족이 될 계획이죠. 어엿한 부부가 된 기무상과 가제루상이 그들만의 가정을 꾸리고 바람대로 항상 기쁨과 슬픔, 매 순간의 감정을 공유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대해 봅니다.

※ 본 기사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플랫폼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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