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서 시작된 호칭파괴, 현대차도 합류
직급 줄이고 부장·과장 대신 ‘OO님’
4차산업혁명. 기업문화 개선 가속화
인사재도 등 근본적 변화 동반 필요
【투데이신문 최병춘 기자】 “택진님” “재현님”. 대표적인 게임기업인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와 CJ그룹의 오너인 이재현 회장을 회사에서 부르는 공식 호칭이다. 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 주요기업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부장님’ ‘과장님’이란 호칭도 ‘~님’ 또는 ‘프로’ 등으로 바뀌면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호칭파괴를 통한 수평적 기업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4차산업혁명에서 창의성이 강조되면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조직문화 개선 의지, 이를 구현하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 없이 겉치레 개혁으로는 기대하는 효과를 내기 힘들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님’만 남고 사라진 ‘과장‧부장’
현대‧기아자동차가 1일부터 직원 인사제도를 대폭 개편했다. 5급 사원부터 부장까지 6단계였던 직급이 매니저와 책임매니저 등 2단계로 축소 통합됐고 승진 연차도 폐지됐다.
직급체계 개편으로 호칭도 달라진다. 사원과 대리는 매니저로, 부장‧차장‧과장은 책임매니저로 불린다. 새 지급체계와 이에 따른 호칭 제도는 이날부터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를 시작으로 계열사별로 순차적으로 시행된다.
재계에 이 같은 수평적 조직문화 개혁 흐름은 몇 해 전부터 본격화됐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꼽힌 혁신이 이른바 ‘호칭 파괴’다. CJ는 지난 2000년 부터 직급은 그대로 두고 모든 직원들을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재현 그룹 회장도 공식 회의에서는 ‘이재현님’이라고 불러야한다.
CJ그룹 처럼 파격적이진 않지만 이후 다른 기업에서도 전통적인 ‘부장님’ ‘과장님’을 대체하는 호칭파괴 흐름은 이어졌다. IT업계 또는 소비자 근접성이 높은 유통 대기업들의 호칭 변화 대열에 합류했다. 아모레퍼시픽은 CJ그룹과 마찬가지로 ‘~님’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IT업계 쪽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네이버, 카카오그룹 등 IT 기업들은 닉네임이나 영어호칭을 사용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넷마블과 엔씨소프트도 직급을 모두 없애고 이름에 ‘님’만 붙여 호칭한다. 엔씨소프트 직원들의 명함에는 별도 직책이 없을 경우 이름만 노출돼 있다.
SK그룹의 경우 SK텔레콤이 2006년부터 직급을 폐지하고 ‘매니저’라는 직책을 부여하며 이 같은 흐름에 동참했다. 이후 SK그룹 각 계열사는 ‘님’, ‘매니저’, ‘PL(프로젝트리더)’ 등으로 호칭을 단순화했다.
삼성전자도 지난 2017년 3월부터 기존 7단계 직급을 4단계로 줄이는 직급개편에 나서면서 임직원간 호칭을 ‘님’, ‘프로’ 등으로 바꿨고 LG전자 또한 같은해 6월부터 직급단계 축소(5단계⟶3단계)와 함께 호칭도 대리와 과장은 ‘선임’으로, 차장과 부장은 ‘책임’으로 바꿨다.
여기에 최근 현대차그룹까지 합류하면서 호칭파괴 등을 통한 수평적 조직문화 개선 바람은 재계에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직 대신 수평, 창의성을 끌어내라
현대차그룹은 한 때 국내기업 중에서도 보수적인 기업이란 인식이 강했던 곳이다. 하지만 몇해전부터 재계에 불어온 호칭 파괴 등으로 대변되는 수평적 조직문화 개혁 바람에 합류하는 분위기다. 이미 올해 3월 현대자동차그룹은 복장 자율화를 실시한 바 있다. 이후 지난 4월 기존 이사대우와 이사, 상무까지의 임원 직급 체계를 상무로 통합, 기존 사장 이하 6단계 직급을 4단계로 단순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변화와 관련해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전통적 제조업의 인사제도인 연공 중심, 수직적인 위계구조에서 탈피해 새 인사제도를 기반으로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방식을 변화시켜 미래산업에 빠르게 대응 할 수 있는 민첩한 조직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존 연공 중심·수직적인 위계구조에서 일 중심의 수평적 문화로 변화하기 위한 조치로 직원들이 연공이 아닌 업무 전문성 강화, 의사결정 속도 향상에 따른 업무효율성 강화라는 기대가 깔려있는 조치다.
재계에서 호칭파괴는 직급체계 축소, 복장 자율화 등과 함께 병행 추진되는 분위기다. 이 같은 수평적 조직문화를 확산해 업무 효율성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하겠다는 취지다.
사원이 대리·과장·차장을 거쳐 부장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보고 체계가 단순화될 수 있다. 또 각 서열별로 주어진 업무 재량권도 확대되면서 책임감이 강화되는 동시에 수동적 업무 태도도 보다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뒤따른다.
이와 함께 직급 단계가 축소되면서 내부에서는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방편이 되기도한다. 동시에 직원들에게는 승진에 대한 압박감을 줄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포장만 혁신? 효용성 아직 물음표
하지만 이 같은 호칭 또는 직급파괴에 효과에 대한 의문 또한 뒤따르고 있다.
실제로 호칭·직급에 변화를 줬다가도 이전 체계로 돌아간 경우도 있다. 제도 시행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호칭‧직급 변화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현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 대부분인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5월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이 기업 962개를 대상으로 ‘기업 내 직급‧호칭파괴 제도’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한 기업의 65.4%가 ‘호칭파괴 제도’가 효용성이 낮다고 보고 있었다. 실제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112개사)의 25%도 실효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또한 도입하지 않은 기업(822개사)의 83.3%는 향후에도 도입 의사가 없었다.
지난해 ‘호칭파괴 제도’ 도입을 한 기업은 11.6%에 불과했고 도입을 하지 않거나, 도입을 해도 다시 직급 체계로 회귀한 기업은 88.3%에 달했다.
KT의 경우 지난 2009년 팀장급 아래 직급과 호칭을 ‘매니저’로 단일화했다가 5년여 만인 2017년에 다시 원상복귀 시켰다. 한화그룹도 지난 2012년 ‘매니저’로 호칭을 통일했으나 2년 전 ‘부장’ ‘차장’ 등 전통적 호칭 체계로 돌아왔다.
책임자가 명확치 않아 업무 효율이 저해된다거나 다른 회사와 일할 때 호칭 문제로 업무 혼선이 빚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직원들 사이에서 승진해도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도 나왔다.
배달 앱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의 경우 사원·주임·선임·책임·수석 등 직급 호칭을 유지하고 있다.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조치다. CJ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직급 호칭 파괴를 임원 등 책임자 이하로 제한해 적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무늬만 바뀐 채 실제적인 변화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호칭과 직급체계가 변했지만 업무 체계가 달라지지 않으면서 조직문화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의 설문조사에서도 도입하지 않는 이유 1위로도 ‘호칭만으로 상명하복 조직문화 개선이 어려워서’(37.3%, 복수응답)가 꼽혔다. 이어 ‘불명확한 책임소재로 업무상 비효율적이어서’(30.3%), ‘승진 등 직원들의 성취동기가 사라져서’(15.6%), ‘조직력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13.4%), ‘신속한 의사결정이 오히려 힘들어서’(12.2%) 등이 뒤를 이었다.
호칭이나 직급 변화로 효과를 얻기 위해선 업무 체계 재편도 동반돼야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람인 임민욱 팀장은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 기업에 혁신이 요구되면서 ‘호칭 파괴’를 도입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직급 호칭파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창조적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조직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정비하고, 그에 맞는 평가와 보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수평적 조직문화 조성을 위해서는 수단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최고 경영진 등 고위 임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호칭 변화를 시도해도 내부에서 동참하지 않는다면 제도 변화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